"한글 몰랐던 엄마, '가나다라' 쓰면서 울었죠"
연합뉴스
입력 2025-07-15 08:00:04 수정 2025-07-15 08:00:04
신간 '니는 딸이니까 니한테만 말하지'


손주를 등에 업고[연합뉴스 자료사진. 손주를 등에 업고 귀하는 할머니]

(서울=연합뉴스) 송광호 기자 = 최숙희 씨는 72세로 일할 나이를 훨씬 지났지만 주 7일 일하고 있다.

애들이 다 커서 한시름 놓았으나 이번엔 손주들이 할머니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평일에 아들 집에서 먹고 자면서 손주 셋을 돌봤다. 오전에는 학교를, 오후에는 학원을 보냈다. 하루에 밥상만 다섯 번을 차렸다. 주말에는 예식장 뷔페 주방에서 전을 부치고 설거지를 했다.

사실 최씨에겐 아들도 모르는 비밀이 있었다. 한글을 읽지 못한다는 것이다. 열한 살에 초등학교를 그만두고, 일을 시작해 동생들을 뒷바라지했고, 그 이후에는 결혼해 자녀를 키우느라 글 배울 시간이 없었다. 학교에 다닐 때도 일을 병행하느라 제대로 공부하지 못했다.

서울 시내의 한 노래방[연합뉴스 자료사진]

문맹(文盲)은 늘 최씨의 수치심을 자극했다. 그는 평생 한글을 모른다는 사실을 남들에게 들킬까 전전긍긍했다. 노래방에 가면 수줍은 척 앉아 있기 일쑤였고, 손녀가 동화책이라도 읽어달라고 하는 날에는 갑자기 할 일이 있다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최씨는 65세 때 처음으로 딸에게 자신이 한글을 모른다는 사실을 알리며 한글 학원을 알아봐달라고 부탁했다. 처음 학원을 다녀온 날, 최씨는 '가나다라'를 쓰면서 울었다. 원망 섞인 울음은 한 번에 족했다. 그는 곧 공부에 매진했다.

"엄마는 무섭도록 집중했다. 밤이고 낮이고 최소한으로 움직이며 공부만 했다. 하루에 A4용지 네 장을 앞뒤로 거뜬히 쓸 만큼 눈에 보이는 모든 글자를 옮겨 적었다. 학원에는 엄마처럼 못 배운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엄마는 그 사람들이 참 좋다고 했다."('니는 딸이니까 니한테만 말하지' 중)

최씨는 이처럼 열심히 공부하며 만학의 꿈을 키워갔지만, 곧 배움을 중단해야 했다. 손주를 돌봐달라는 아들의 요청을 거절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아들은 엄마 속을 몰랐다.

"오빠는 아무것도 몰랐다. 엄마가 한글을 모른다는 사실을, 그 사실 때문에 수도 없이 괴로운 밤이 있었다는 사실을."

한글 쓰기[연합뉴스 자료사진]

김소영 씨가 쓴 에세이인 신간 '니는 딸이니까 니한테만 말하지'에 나오는 내용이다. 저자 김씨는 최씨의 딸이다. 책은 1992년생인 저자가 엄마와 나눈 대화를 엮은 인터뷰집이자, 최씨의 삶을 기록한 채록(採錄)이다. 베이비부머 세대인 최씨가 겪어온 고난의 삶을 엮었다.

책에는 표제작 '니는 딸이니까 니한테만 말하지'를 비롯해 홍아란 씨의 '"하고 싶은 건 하고 살아야지" 어느 세일즈우먼의 모험', 박하람 씨의 '돈보다 소중한 건 등 뒤에 있었다'도 함께 실렸다.

작가이자 출판사 딸세포 대표인 김은화 씨가 지난해 여름부터 가을까지 진행한 '모녀 구술생애사 워크숍'의 결과물을 묶었다. 김 대표는 "딸들은 모두 90년대생이고, 어머니들은 1954~65년에 걸쳐 태어난 베이비부머 세대"라고 소개했다.

336쪽.

[딸세포 제공. 재판매 및 DB금지]

buff27@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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