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과 결정의 시간"…농산물·알래스카 가스·국방비 등 민감 사항 산적
전문가 "대통령실 등 정부 최상위 차원 조정·설득 필요한 국면"
전문가 "대통령실 등 정부 최상위 차원 조정·설득 필요한 국면"

(세종=연합뉴스) 차대운 기자 = 한미 양국이 8월1일 25% 상호관세 부과 예고 시한을 앞두고 '랜딩 존'(합의점)을 찾기 위한 협의 노력을 가속하고 있다.
관세 협상의 외연이 통상을 넘어 안보까지 포괄하는 '원스톱 쇼핑' 방식으로 사실상 넓어진 가운데 미국은 자국 상품 구매 확대를 통한 무역 불균형 해소부터 한국의 대미 투자 대폭 확대, 소고기 등 농산물 시장 개방, 한국 국방비 확대 등의 요구를 쏟아낸 것으로 전해졌다.
정부는 미국의 수많은 요구 중에서 무엇을 받고, 무엇은 지켜낼지 '선택과 결정'을 하기 위해 사실상 '국내 협상'에 돌입한 모습이다.
전문가들은 이제는 대통령실 등 정부 최상위 차원의 조정과 설득 노력이 필요한 때라고 지적한다.
◇ 美 '3대 요구' 농산물·디지털·자동차…'트럼프 관심' 알래스카 LNG까지
16일 통상 소식통들에 따르면 관세 협상이 거듭 진행되면서 미국 요구의 윤곽이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미국은 우선 관세를 지렛대 삼아 대한국 무역적자 축소를 통한 무역 균형 추구와 자국 제조업 부흥을 위한 한국의 대규모 투자 등을 핵심 요구 사항으로 내걸고 관철하려는 것으로 분석된다.
무역 균형 추구와 관련, 미국은 한국에 가스·원유 등 에너지와 농산물 구매 확대를 요구하면서 한국이 '구체적인 숫자'를 제시하길 희망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한국에 대한 미국의 무역 적자와 관련해서는 한국의 '일방향' 자동차 수출을 집중적으로 문제 삼고 해결 방안을 압박 중이다. 작년 한국의 대미 무역수지 흑자는 약 556억달러로 자동차 흑자가 절반이 넘는 약 320억달러에 달했다.
비관세 장벽 분야에서는 연례 국가별 무역장벽보고서(NTE)에 거론된 대부분 사안을 요구했는데, 특히 농산물과 디지털 분야에서 높은 압력을 가하고 있다.
국내에서 특히 민감한 농산물 영역에선 30개월 이상 미국산 쇠고기 수입 허용, 쌀 수입 쿼터 확대, 사과 등 과일 검역 완화, 미국 기업의 유전자변형생물체(LMO) 수입 허용 등을 우선해 요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농민들은 미국의 러스트 벨트 노동자 계층과 더불어 트럼프 대통령이 중요하게 여기는 지지층인 만큼, 미국 정부는 농산물 분야에서 한국의 구체적 양보를 끌어내려는 의지가 매우 강하다는 평가다.
디지털 분야도 미국이 한국에 양보를 반드시 얻어내고자 하는 대표적 분야다. 미국 측은 자국 빅테크 기업이 불합리한 규제라고 주장해온 온라인 플랫폼법과 망 사용료 부과 도입 계획 철회, 구글의 정밀지도 반출 허용 등을 강력히 요구한 것으로 전해진다.
대미 협상 사정에 밝은 정부의 한 관계자는 "미국 측의 핵심 요구는 농산물, 디지털, 자동차 3가지에 집중되는 것으로 보면 된다"고 전했다.
미국은 이 같은 한미 간 무역 균형 추구를 위한 요구 외에도 자국의 제조업 부흥이라는 전략적 목표 달성을 위한 요구도 동시에 내놓고 있다. 앞서 발표된 현대차그룹의 미국 제철소 투자 사례와 같은 대규모 대미 투자 확대 약속을 받는 데 협상 초점을 맞추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와 관련,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부 장관은 최근 워싱턴 DC에서 여한구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을 만나 '일본의 제안'을 거론하면서 한국 정부도 한국 기업의 대미 투자를 뒷받침하는 대규모 '투자 펀드'를 조성하는 방안을 마련하기를 희망한다는 뜻을 피력한 것으로 전해졌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손정의(일본 이름 손 마사요시) 소프트뱅크 회장의 주선으로 미일 정부가 마중물 자금을 내는 '미국·일본 공동 국부펀드' 조성을 논의하고 있다며 초기 규모가 3천억달러(약 410조원)에 달할 것이라는 전망을 전한 바 있다.
한미 관세 협상의 본류에 들지 않지만 협상 전체 판을 좌우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 사안으로는 알래스카 LNG 개발 프로젝트가 꼽힌다.
트럼프 행정부 '에너지 차르'인 더그 버검 국가에너지위원회 의장은 지난달 27일(현지시간) 백악관을 방문한 여한구 본부장을 만나 트럼프 대통령이 각별히 관심을 둔 사안이라면서 알래스카 LNG 개발 프로젝트의 한국 참여를 강력히 요청했다.
◇ 농산물 등 민감성에 '정부 내 합의'부터 진통…"대통령실 나서야"
여기에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등 안보 문제까지 더해지면서 한미 간 협상은 경제와 안보 영역을 모두 아우르는 '원스톱 쇼핑' 식으로 확대된 상황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을 연간 100억달러로 올려야 한다고 공개 언급한 것을 비롯해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방비 비중 5%까지 확대, 중국을 겨냥한 주한미군 전략적 유연성 명시화 등의 요구를 대한국 상호관세 부과와 연계하려 할 가능성이 큰 것으로 점쳐진다.
정부는 당장 8월 1일 상호관세 부과 시점을 앞두고 미국의 요구 가운데 전향적으로 수용을 검토할 수 있는 부분과 반드시 지켜야 할 '레드라인'을 정해야 하는 처지다.
무역 협상 결과를 좌지우지하는 트럼프 대통령을 설득하려면 수입 확대 목표액, 투자 약속액 등 직관적 '숫자'가 담긴 제안을 구체적으로 마련해야 할 필요가 크다는 지적이 나온다.
아울러 일본의 완강한 쌀 시장 개방 반대에 트럼프 대통령이 타결에 근접했던 협상 판을 뒤집었던 사례에서 볼 수 있듯, 트럼프 대통령이 농민 유권자들에게 제시할 성과를 반드시 챙기려 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실제로 지금껏 미국이 타결을 선언한 영국, 베트남, 인도네시아의 사례를 보면 농산물을 포함한 미국 상품의 구매 확대 계획이 담겼거나, 그간 민감하게 관리되던 농산물 시장의 개방을 약속한 공통점이 있다.
일례로 트럼프 대통령은 15일(현지시간) 인도네시아와 협상 타결을 선언하면서 인도네시아가 자국 에너지 구매에 150억 달러(약 20조8천억원), 미국산 농산물 구매에 45억 달러(약 6조2천500억원), 대부분이 777 모델인 50대의 보잉 항공기를 구매하기로 약속했다고 자랑했다.
이런 가운데 민감 농산물 개방부터 알래스카 LNG 프로젝트 참여, 주한미군 방위비 인상, 국방비 대폭 확대에 이르기까지 하나하나가 국내에서 치열한 논란을 부를 민감한 사안이라는 점에서 미국과 협상에 앞서 '정부 내 합의'부터 큰 진통이 예상된다.
당장 소고기와 사과 등 농산물 개방 문제를 두고 무역 의존도가 큰 산업 국가로서 원만한 대미 합의 도출을 상대적으로 중요하다고 판단하는 산업부는 전향적 검토가 필요하다고 보지만, 농민들의 희생 가능성을 우려할 수밖에 없는 농림축산식품부는 강력한 우려 입장을 표명하면서 정부 내 협의 과정에서 뚜렷한 합의점을 찾지 못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한 정부 관계자는 "정부 간 협의는 전부터 진행되어왔지만 하나같이 민감한 사안이라는 점에서 결정이 이뤄지지 못한 측면이 있다"고 전했다.

나아가 농민단체들도 농산물 수입 개방 가능성에 공개 반발하고 나섰고, 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 소속 더불어민주당 의원들도 지난 15일 "농업·농촌·농민이 희생양이 돼선 안 된다"는 공동 성명을 내는 등 사회적 합의 마련은 더욱 쉽지 않은 과제가 될 전망이다.
따라서 정부 최고위 차원의 결단을 통한 협상 방향 설정과 이해관계자 설득 노력이 중요한 국면에 접어들었다는 지적이 나온다.
허윤 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연합뉴스와 통화에서 "정부 부처 내에서, 정부와 국회 간에 높은 차원서 협의와 조정, 설득 과정이 빠르게 이뤄져야 한다"며 "가장 상위 의사 결정권자 차원에서 어디까지 주고, 무엇을 지킬 것인지에 합의가 마련되어야 하기에 적극적으로 대통령실이 나서야 하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cha@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