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VIBE] 최만순의 약이 되는 K-푸드…보리 한 알에 담긴 생존의 연대기
연합뉴스
입력 2025-07-14 14:17:09 수정 2025-07-14 14:17:09


익어가는 보리연합뉴스 자료사진

[※ 편집자 주 = 한국국제교류재단(KF)의 지난해 발표에 따르면 세계 한류 팬은 약 2억2천500만명에 육박한다고 합니다. 또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초월해 지구 반대편과 동시에 소통하는 '디지털 실크로드' 시대도 열리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한류 4.0'의 시대입니다. 연합뉴스 동포·다문화부 K컬처팀은 독자 여러분께 새로운 시선의 한국 문화와 K컬처를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되고자 전문가 칼럼 시리즈를 준비했습니다. 시리즈는 매주 게재하며 K컬처팀 영문 한류 뉴스 사이트 K바이브에서도 영문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전통 누룩연합뉴스 자료사진

여름이 막 시작되던 어느 날, 필자의 기억 속 부엌은 구수한 보리밥 냄새로 가득했다. 아궁이 위 가마솥에서는 보리쌀이 뜸을 들이며 익어가고, 부엌 한가득 퍼진 그 내음은 곧 여름이 성큼 다가왔음을 알려주는 신호탄이었다.

순천 조계산 보리밥집연합뉴스 자료사진

채반에서 김을 내는 보리밥, 어머니 손에서 볶여가는 통보리, 우물물에 씻긴 박하의 향기.


보리는 먹거리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계절을 이겨내고 가족의 기운을 지키는 어머니의 손길이자, 삶의 지혜였다.


한때 가난의 상징처럼 여겨졌던 보리는 오히려 가장 오래된 생존의 동반자였다. 인류가 석기시대부터 재배한 이 곡물은 세계 4대 작물 중 하나이며, 한국 전통 오곡 중에서도 쌀 다음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왔다.


1960년대, 봄이 되면 '보릿고개'라는 절박한 계절을 넘기기 위해 많은 사람이 보리밥으로 끼니를 때웠다. 흰쌀이 귀하던 시절, 구수한 보리밥과 짭조름한 된장국 한 그릇이 유일한 식사였던 그 시절. 지금은 흔해진 쌀과 변화된 식문화 탓에 보리의 자리는 줄었지만, 그 가치와 효능은 오히려 오늘날 더 절실하게 돌아보게 된다.


◇ 손자병법으로 본 보리의 생명력


손자병법은 전쟁의 기본이 지형에 있다고 말한다. 평지, 협곡, 요충지, 교차지, 사지 등 다양한 지형을 이해하고 그에 맞게 전략을 세워야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전쟁의 원칙은 오늘날 식탁 위에서도 유효하다. 필자는 보리라는 곡물을 통해 그 전략적 지혜를 다시 읽는다.


보리밥은 '통지'(通地)다.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평지처럼, 쌀과 섞어 먹으면 소화가 잘되고 담백하다. 특히 삶아둔 보리쌀을 뜸 잘 들여 지으면 질지 않고 오히려 고소하다. 쌀밥보다 덜하지만, 장과 위를 보호하는 식사로서는 가장 전략적인 지점이다. 이런 통지는 전쟁터에서 먼저 자리를 차지한 자가 이긴다. 보리밥 역시 식탁의 중심을 선점할 수 있는 고지다.



보리차는 '괘지'(掛地)다. 보기에는 쉬워 보여도 막상 깊숙이 들어가기 어려운 지형. 보리차는 볶은 보리를 우려내어 갈증과 위장을 다스리는 여름철 최고의 음료다. 겉으로 보기에는 보통 차 한 잔이지만, 더위와 습기, 속 더부룩함까지 다스리는 숨은 무기다. 전쟁에서 괘지는 깊이 파고들어야 참모습이 드러나는 땅이다. 보리차도 마찬가지다.


보리누룩은 '지지'(支地)로 비유할 수 있다. 눈에 띄지는 않지만, 아군에게 유리한 위치에 있는 지형. 보리누룩은 장 건강을 돕는 유익균의 터전이자, 각종 발효식품의 출발점이다. 고추장, 된장, 술, 식혜 등 모든 건강한 발효 음식의 시작이다. 지지는 병참기지다. 없으면 전투 자체가 불가능하다. 보리누룩은 우리 식생활에서 바로 그런 존재다.


보리빵은 '교지'(交地)다. 보리와 밀, 효모가 만나 현대적 식문화를 만들어낸다. 전통과 서구식 빵 문화가 만나는 교차점에서 당을 줄이고 식이섬유를 늘린 건강식으로 진화 중이다. 빵의 대안, 탄수화물의 전략적 타협점으로서 보리빵은 다문화적 전장이 된다.


보리로 만든 술은 '중지'(重地)다.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핵심 요충지처럼, 발효 기술과 시간, 풍미가 모두 집약된 보리술은 단순한 기호식품을 넘어 감정과 관계를 녹여내는 매개체다. 누룩으로 시작된 보리의 향이 알코올로 완성되기까지의 시간은 기다림이 곧 전략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보리싹은 '사지'(死地)다. 싹을 틔운다는 것은 물러설 수 없는 땅에 희망을 뿌리는 일이다. 보리싹은 실패를 감수해야만 얻을 수 있는 생명의 시작이다.

싹 틔운 보리로 만든 식혜 한 그릇, 더위에 지친 몸을 살리고 장을 돕는 여름철 최고의 보양이다. 죽음을 각오하고 살아남는 전략, 그것이 사지다. 보리싹은 그러한 각오의 상징이다.


◇ 생명과 사랑의 부엌에서 피어난 지혜


어머니의 부엌은 전략의 현장이었다. 계절에 맞춰 식재료를 고르고, 뜸을 들이고, 불의 세기를 조절하며 만들어낸 그 음식들은 계절병을 예방하고 체력을 회복하는 자연치유의 기술이었다.


여름이 시작되면 어머니는 보리밥과 함께 돼지고기와 박하, 질금 가루를 넣은 돼지고깃국을 끓이셨다.


"이 국은 더위와 나쁜 열기를 몰아내는 보약이야."


그 말씀 한마디에 담긴 진심은 음식 너머였다.


장작불 아궁이 위에서 피어오르던 국물의 향기, 부뚜막에 놓인 보리쌀과 채소들, 물기를 털어낸 박하.


그런 부엌의 기억은 필자에게 음식의 진정한 의미를 일깨운다. 생명을 돌보는 일, 가족을 지키는 일, 계절을 이겨내는 일. 그 모든 것을 보리는 조용히 감당해왔다.


오늘날 보리는 다시 '슈퍼 곡물'로 불리며 조명을 받고 있다. 보리잎 추출물에는 SOD, 베타카로틴, 비타민 C·E 같은 항산화 성분이 풍부하며, 식이섬유 베타글루칸은 혈당과 콜레스테롤을 낮추는 데 도움을 준다. 스마트팜과 정보통신 기술이 융합된 농법을 통해 보리는 기능성 식품으로 진화하고 있다.


손자는 말했다. "지형을 알면 싸움을 피하고 이긴다."


나는 여기에 덧붙이고 싶다.


"보리를 알면 계절을 이기고 건강을 지킬 수 있다."


변화와 생존, 조화와 전략, 모든 것이 보리 한 알에 담겨 있다.


보리밥, 보리차, 누룩, 빵, 술, 그리고 싹. 그것은 곡식이 아니라 철학이고, 전략이고, 사랑이다. 우리가 지금 딛고 있는 삶의 땅이 어떤 지형인지 고민하고, 그 위에 어떤 음식을 올릴지 결정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현대적인 손자병법이 아닐까.


보리는 여전히 우리 곁에 있다. 더는 가난의 상징이 아니라, 건강과 지혜의 상징으로서. 오늘, 다시 보리를 식탁 위에 올려야 할 때다.


최만순 음식 칼럼니스트

▲ 한국약선요리 창시자. ▲ 한국전통약선연구소장. ▲ 중국약선요리 창시자 팽명천 교수 사사 후 한중일 약선협회장 역임.

<정리 : 이세영 기자>

seva@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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