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나는 소련 386 학생운동권 출신…한국 386은 완전 거꾸로 갔다"
연합뉴스
입력 2025-04-22 06:01:11 수정 2025-04-23 10:01:35
"1980년대 소련 대학생들, 시장경제와 자유 민주주의 위해 투쟁"
"한국 운동권 학생들, 국가사회주의 건설 목표로 학생운동 전개"
"경제발전 중시해야 진보세력이다"…소련 출신 란코프 국민대교수


연합뉴스와 인터뷰 중인 란코프 교수[윤근영 기자 촬영]

[※ 편집자 주=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 교양학부 교수의 인터뷰 기사는 분량이 많아 네 차례로 나눠 송고합니다. 이번이 첫 번째 기사로 란코프 교수의 성장 과정과 레닌그라드 대학 재학시절 학생운동 등을 다뤘습니다. 다음 주에 송고하는 두 번째 기사는 사회주의 정치 시스템 등에 대한 평가 등을 담을 예정입니다. 세 번째와 네 번째 기사는 남한의 핵무장 문제, 동아시아 긴장 등을 담을 예정입니다. [삶]은 자서전적 인터뷰여서 개인 스토리와 개인 사진 등이 많이 들어갑니다.]

어린 시절 란코프 교수와 어머니[본인 제공]

(서울=연합뉴스) 윤근영 선임 기자= "나는 1980년대에 소련(러시아)의 국립 레닌그라드 대학교(현재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교)를 다녔고 동아리 활동도 했습니다. 한마디로 소련의 386 운동권 학생이었습니다. 당시 소련의 운동권 학생들은 시장경제와 자유 민주주의를 진보로 판단했고 이를 위해 싸웠습니다. 똑같은 시기에 한국의 학생들은 소련의 국가사회주의 정치경제 시스템을 지향하는 PD(민중민주) 계열과 북한을 모델로 하는 NL(민족해방) 계열로 양분돼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이들 학생은 모두 사회주의 건설을 목표로 했습니다. 한국의 학생운동권이 이렇게 거꾸로 간 것은 해외 흐름을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안드레이 란코프(61) 국민대 교양학부 교수는 연합뉴스와의 세 차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는 "1960년 이후 놀랄만한 경제 성장을 이룬 거의 유일한 나라가 한국이었는데, 이 나라 학생 운동권은 이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빈부 격차 등 부작용에 집중했기 때문에 사회주의 운동을 전개한 것"이라고 했다.

란코프 교수는 "나는 이미 15∼16세 무렵인 1970년대 후반기에 소련의 사회주의가 붕괴될 것으로 예상했다"면서 "이는 소련 경제가 갈수록 낙후되고 미국, 유럽 등과의 격차가 확대됐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소련 국민들도 대체로 공식 사상을 믿는 척했거나 적어도 공개적으로는 도전하지 않았다"면서 "그렇지만 실제로 믿었던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했다.

란코프 교수는 "소련 사람들은 공산주의가 이야기하는 돈도 없고, 물질적 부족도 없고, 계급도 없는 천국과 같은 사회가 올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고 했다.

1963년 상트페테르부르크(당시 레닌그라드)에서 태어난 란코프 교수는 1980년 레닌그라드 대학교 중국역사학과에 입학했다. 1984년 9월부터 10개월간 북한 김일성종합대학교에서 유학 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는 1992년부터 4년간 한국의 오산대학교, 중앙대학교에서 러시아어를 강의했고, 1996년부터 8년간 호주 국립대학교에서 중국·한국 역사학과 교수로 근무했다. 2004년부터 국민대 교양학부 교수로 재직하면서 북한학 등에 대해 강의 중이다. 그는 모교에서 한국의 4색 당파를 다룬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란코프 교수 어머니가 운전했던 무궤도 전차[란코프 교수 제공]

-- 고향은 어디인가.

▲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다. 1924년 레닌이 사망하면서 이 도시 이름이 레닌그라드로 바뀌었다. 1990년대 초 소련 붕괴 이후에는 원래 이름으로 되돌아갔다. 나는 이 도시에서 태어났고, 이곳에서 성장했다.

--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어떤 도시인가.

▲ 러시아에서는 수도라고 하기보다는 '수도들'이라고 표현한다. 그 수도들은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말한다. 내 고향은 전통적으로 중화학공업이 발달한 도시다. 모스크바만큼 힘이 세지 않고, 돈이 많지 않아도 다른 러시아 도시들보다는 기회가 참 많다. 좋은 대학교도 많고, 좋은 연구소, 박물관 도서관 등도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인구는 600만명 정도 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내가 성장할 때는 400만-500만명이었다. 인구가 늘어난 것은 기회를 잡기 위해 도시로 사람이 몰리기 때문이다.

-- 본인은 레닌그라드 대학교를 졸업했는데, 당 간부의 아들이었나.

▲ 대학 이름이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으로 바뀌었다. 우리 부모님은 엘리트 계층이 아니었다. 나는 서민 집 외아들이었다. 아버지는 선박 등에 사용되는 대형 보일러의 기사였고, 어머니는 궤도열차와 무궤도 열차의 운전기사였다. 내가 7살 때 부모님은 이혼했다. 나는 부모님의 결별 이후 어머니, 외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 부모님은 왜 이혼했나.

▲ 왜 이혼했는지 알지만, 사적인 일이어서 말하기 곤란하다. 러시아에서는 부모가 이혼하면 자녀들은 거의 예외 없이 어머니와 함께 산다. 그걸 당연하게 생각한다. 어머니가 키우는 비율이 95%나 되는데, 자녀 양육에는 어머니가 더 낫다고 보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양육비를 지원한다.

한국 기준 중학생 시절 친구들과 함께한 란코프 교수(맨 오른쪽)[본인 제공]

-- 부모님은 어떤 분이었나.

▲ 어머니는 운전기사 노동자였지만 세계에 대한 지식이 많았다. 책도 많이 읽으신 분이었다. 1970년대 브레튼우즈체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통화체제)가 흔들렸을 때 나는 8∼9살 무렵이었다. 그때 어머니는 금본위제가 무엇인지, 브레튼우즈체제가 무엇인지 정확히 설명했다. 아직도 당시의 어머니 설명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 아버지는 사냥과 캠핑을 좋아하는 분이었다.

-- 당시 소련에서는 노동자 출신이 대학 진학하는 것이 어려웠나.

▲ 그렇지는 않았다. 대부분의 청소년이 대학교에 진학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부모들도 자녀들을 열심히 공부시키려 하지 않았다. 나의 어머니는 달랐다. 나를 좋은 대학에 보내야겠다는 생각이 강했다. 나의 교육을 생각해서 재혼도 하지 않으셨다.

-- 본인은 어떤 초등학교에 다녔나.

▲ 당시 소련에서는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가 통합된 10년제 학교였다. 지금은 11년제로 바뀌었다. 그 당시 학교는 이름이 없었고 번호가 있었는데, 내가 다녔던 학교는 188번이었다. 당시 레닌그라드 시내 구역마다 이런 학교가 있어서 모두 합하면 수백개는 됐다.

-- 188번 학교에 계속 다녔나.

▲ 5학년 무렵에 159번 학교로 옮겼는데, 188번 학교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전학을 한 것은 어머니가 보다 더 큰 아파트로 이사했기 때문이다. 할머니와 어머니가 각각 작은 아파트 1채씩 소유하고 있었는데, 이들 2채를 보다 더 큰 아파트 1채와 교환했다.

마르크스의 '자본론' 초판 표지[란코프 교수 제공]

-- 대학교 이전의 학창 시절은 어떠했나.

▲ 나는 저학년 시절부터 역사에 관심이 많았다. 교과서 외에 세계사, 고대사, 근대사 등에 대한 책을 많이 읽었다.

-- 왜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됐나.

▲ 그건 나도 모른다. 사람이 이유 없이 어떤 사람과 사랑에 빠지는 것과 비슷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7∼8살 때부터 역사만큼 좋아하는 과목이 없었다.

-- 소련 아이들도 한국 학생들처럼 국어, 영어, 수학 등을 모두 공부했나.

▲ 소련의 학교 문화는 한국과 비슷했다. 양국 모두 독일 교육방식을 따랐기 때문이다. 한국은 일본의 영향을 받았는데, 일본은 독일에 가서 배워왔다. 제정 러시아의 교육시스템도 독일 사람들이 와서 구축한 것이었는데, 1917년 공산주의 혁명 이후 소련도 제정 러시아 교육체제를 대체로 유지했다.

-- 소련에서 선생님들은 수업에서 통제받지 않았나.

▲ 통제가 없지는 않았지만 심하지 않았다. 현재의 북한과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자유로웠다.

-- 당시 선생님들은 북한에 대해 뭐라고 이야기했나.

▲ 스탈린주의적 독재 국가라고 했다. 남한에 대해서는 친미 파시즘적 군사 독재국가라고 설명했다.

-- 초등학교 시절에 그렇게 교육받았다는 것인가.

▲ 그때가 10학년 정도였으니 한국으로 치면 고등학생 시절이었다. 세계 근대사를 배울 때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 교과서에 그렇게 적혀 있었던 것은 아니었고, 선생님들이 말로 그렇게 설명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대학(과거 레닌그라드대학) 모습[란코프 교수 제공]

-- 당시 소련에서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사상교육이 강하게 진행됐나.

▲ 그렇게 심하지 않았다. 다만 대학교 이전 단계에서는 학교 선생님들이 역사 수업 시간 등을 통해 사상 교육을 어느 정도 했다. 학생들은 그 교육 내용을 별로 믿지 않았다. 시험을 보기 위해 외웠을 뿐이다. 선생님들도 마찬가지다. 그분들은 가끔 필요한 내용을 녹음기처럼 반복해서 이야기했는데, 그들의 표정만 봐도 자신이 말하는 것을 믿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느낄 수 있었다.

-- 대학교 교수들도 사회주의 교육에 소극적이었나.

▲ 레닌그라드 대학에서 마르크스 경제학, 사적 유물론, 과학적 공산주의 등 의무적으로 들어야 하는 사상 과목이 있었다. 그러나 교수들 가운데 무조건 공식 내용만 수업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진짜 교육'을 하려는 분들도 있었다. 예를 들면 마르크스 경제학 과목을 담당한 교수님이 있었다. 그분은 수업 중에 '진짜 경제학'에 대해 설명하셨는데, 그것은 케인스 경제학을 포함한 시장 경제학에 대한 내용이었다. 그분은 대학교 졸업 후 무역 업무를 했을 때 자신이 '진짜 경제'를 잘 모른다는 것을 깨달아서 학생들에게 진짜 현대 경제학을 설명하겠다는 마음을 먹었다고 했다.

--1980년대 한국의 운동권 학생들은 마르크스의 '자본론' 등을 열심히 공부했는데.

▲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어려운 책이다. 소련에서는 대학교에 들어가서야 필수적으로 공부한다. 그런데 소련 대학생들은 그 논리를 믿지 않았다. 1960년대 소련에서 태어난 사람들에게는 반(反)공산주의 경향이 강했다. 그들은 공산주의가 권위주의 독재국가를 정당화하는 수단일 뿐이라고 판단하는 경향이 심했다.

박사과정 시절의 란코프 교수[본인 제공]

-- 본인은 당시 레닌그라드 대학에 입학했는데, 러시아에서 랭킹이 어느 정도인 학교인가.

▲ 러시아에서는 한국처럼 대학교 종합 순위가 있지는 않았다. 당시에 소련에서는 분야별로, 단과대별로 순위를 매길 뿐이었다. 당시의 학생들 인식에 따르면, 나의 모교는 종합순위로 랭킹 4위 정도였다. 1∼3위 대학들은 모스크바에 있다. 오늘날 QS 세계 대학 랭킹을 보면, 레닌그라드 국립대학은 러시아 2위다.

-- 당시 소련에서도 한국처럼 학력고사(현재 수학능력시험) 같은 것이 있었나.

▲ 대학에 들어가려면 내신 점수와 입학시험 점수가 좋아야 했다. 입학시험은 글쓰기, 러시아 문학, 역사, 외국어 등 4과목인데, 각각 시험을 쳐야 했다.

-- 현재 한국에서는 수학과 물리학 등이 입시에서 중요한데.

▲ 나는 수학과 물리학 과목을 뛰어나게 잘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렇지만 입시에서 이들 과목의 비중이 작아서 문제가 되지 않았다. 소련에서 이공계가 항상 홀대받은 것은 아니다. 시기에 따라서는 다시 부상하기도 했다.

-- 본인은 공부를 잘했나.

▲ 아주 잘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모교와 같은 대학에 진학하는 것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레닌그라드 대학교에 입학하고 졸업한 것이 내 인생에서 매우 자랑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10년제 초중고 통합학교에서 종합적으로 전교 3등 안에 들었다. 학교가 종합순위를 매기지 않았기 때문에 정확하지 않지만, 내가 주변 친구들의 성적을 알기에 내 위치를 추정할 수 있었다. 나는 영어 실력이 부족해서 과외수업을 받기도 했다. 다른 학교의 영어 교사로부터 과외수업을 받았는데, 이건 불법이 아니었다.

1980년대 운동권 학생들이 읽었던 서적중 하나인 '자본주의 경제의 구조와 발전' 이 책은 마르크스 경제학의 핵심을 쉽게 풀이했다. 당시 한국 대학교 운동권 2∼3학년생들이 읽었던 이 책은 '자구발'이라고 불리웠다 [SNS 캡처 사진]

-- 당시 당 간부의 자녀들은 좋은 대학에 들어갔나.

▲ 당연히 그렇다. 그러나 좋은 대학교에 입학한 사람들이 간부 집 자녀만은 아니었다.

-- 당 간부 자녀들은 입시에서 특혜를 받았나.

▲ 그들이 인맥을 이용하는 등 부정행위가 없지 않았지만, 그것만으로 입시가 결정되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당 간부의 자녀들이 공부를 열심히 했다. 한국에서 부잣집 자녀들이 서민 자녀들보다 상대적으로 잘 배우고 있는 것과 비슷한 현상이다. 그뿐만 아니라 당시에 소련 당국자들은 좋은 대학교에 서민 출신들이 입학하지 못한다면 문제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사실상 노동자, 농민 집 자녀들에 대한 할당제도가 있었다.

-- 당시 소련 학생들의 대학 진학률은 어느 정도였나.

▲ 20%가량 됐다. 대학교는 5년제였는데, 진학하지 않은 사람들은 주로 전문학교로 갔다. 이 학교는 기술을 배우는 곳으로 2년제였다. 대부분의 청소년은 이 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취업했다.

-- 재수하는 학생들은 없었나.

▲ 당시 소련에서는 재수가 불가능했다. 대학 시험에 떨어지면 바로 군대에 가야 했다. 제도가 그렇게 돼 있었다. 물론 군 복무를 마치고 재수하는 것은 가능했다.

레닌과 스탈린[연합뉴스 자료 사진]

-- 본인은 대학교 시절 동아리 활동을 했나.

▲ 1980년 9월에 아시아학부 중국역사학과에 입학했다. 1984년 9월에는 북한에 가서 조선어 공부를 하고 1985년 7월에 돌아왔다. 북한에 가기 전에는 주로 학교 수업과 관련한 동아리 활동을 했다. 역사에 대한 책을 읽고 토론하는 모임이었다. 북한에서 돌아온 뒤 다시 동아리에 들어가려 했는데, 이전과 뚜렷이 달라진 것이 있었다. 동아리의 정치적 색깔이 강해진 것이다. 그전에는 정치 색깔이 거의 없었다. 소련의 대학에서 자유주의 운동이 시작된 것은 1985년말∼1986년초였다.

-- 정치적 색깔이 강해졌다는 것은 무슨 이야기인가.

▲ 반(反) 공산주의를 주장하고,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도입하자는 것이었다. 소련에서는 그게 진보였다. 국가사회주의 경제는 반동 체제라고 판단했다. 나는 3∼4개의 서클에 들어갔다. 동아리당 회원 수는 20∼30명 정도였다. 1주에 1∼2번 만나는 서클도 있었고, 한 달에 1번 보는 서클도 있었다. 우리는 학교 밖의 문화센터 방을 빌려서 토론을 벌이곤 했다. 나는 박사과정이었던 1990년대 초까지 5∼6년 정도 동아리 활동을 했다. 1980년대 말에 들어와서는 검열이 거의 사라져서 출판물은 거의 모두 합법화된 상태였다.

-- 가두시위를 벌이기도 했나.

▲ 학생들의 시위는 1988∼1989년 때부터 시작됐다. 1989년 11월 동독이 무너졌으니 소련에서는 그전에 시위가 시작된 것이다. 1990년에 들어서는 시위가 더욱 늘어났지만 나는 많이 참여하지 않았다. 정치 분야에 들어가서 선거에 출마하거나, 공직으로 진출할 생각이 잠깐 없지 않았지만, 강하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1930년대 고도 성장기 소련의 젊은이들 [SNS 캡처 사진]

-- 본인은 언제부터 소련의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할 것으로 전망했었나.

▲ 1970년대 말에 그런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내 나이 15∼16세 무렵이다. 한국으로 치면 고등학교 때부터 그런 생각을 한 것이다. 대학교에 들어갔더니 소련이 조만간 무너질 것으로 보는 학생들이 많았다.

-- 왜 소련 사회주의가 무너질 것으로 생각했나.

▲ 경제가 안 좋아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련의 경제가 미국과 유럽에 비해 낙후되고 있었고, 그 격차가 커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공산주의에 대한 적대감이나 회의감이 확산되고 있었다.

-- 1989년부터 사회주의 경제가 붕괴되는 것을 목격하기 시작했을 듯한데, 어떤 느낌이었나.

▲ 좋은 일인지 모르겠지만 당시 상황을 감안하면 불가피하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 한국 자본주의 경제에도 정규직-비정규직 불공정, 대기업-하청기업 착취, 빈부격차 심화, 국회의원·법조인·의사 등 일부 계층의 특권과 갑질 등 문제가 많은데.

▲ 사실이다.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 어디에나 자본주의 사회는 결함이 많다. 그래도 소련식 국가 사회주의보다는 낫다고 판단한다. 어디에도 완벽한 체제는 없다.

-- 소련 붕괴 당시 국민들의 분위기는 어떠했나.

▲ 당시에 지나치게 낙관적인 전망이 많았다. 1∼3년 이내에 소련경제가 미국을 따라잡을 것으로 보기도 했다. 다행히 나는 냉정했다. 소련 경제가 쉽게 좋아질 것으로 예상하지 않았다. 적어도 5∼7년 또는 10년은 걸릴 것으로 봤다. 현재 러시아는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잘 사는 나라가 됐다. 물론 당시 낙관적인 전망을 했던 사람은 곧 올 줄 알았던 '지상천국'이 오지 않아 실망했을 것이다. 나도, 나처럼 생각하는 친구들도 낙관주의가 많지 않아서 실망을 많이 느끼지 않았다.

-- 현재 러시아의 소득수준은 어느 정도인가.

▲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1만3천달러 정도인데, 구매력을 기준으로 하는 PPP 방식으로는 소득수준이 유럽 국가들 못지않다고 본다.

1970년대 레닌그라드 시내의 모습[SNS 캡처 사진]

-- 사회주의 경제는 왜 쇠퇴했다고 보나.

▲ 무엇보다 인센티브가 없기 때문이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기업 경영자는 자기가 원하는 대로 고용할 수도 없고, 해고할 수도 없다. 열심히 일하는 노동자에게 제대로 인센티브를 주기도 어렵다. 경영자들의 자세도 문제였다. 그들은 상품의 품질 수준을 끌어올릴 이유가 없었고, 새로운 기술을 개발할 필요도 없었다. 오히려 품질개선에 도전하는 것은 위험한 행위였다. 자칫하면 그런 시도를 하다가 생산량 목표를 달성하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문책받는다. 그러니 바보가 아닌 바에야 어떤 경영자와 노동자가 열심히 일하겠는가.

-- 계획경제란 것은 현실경제에서 실현 불가능한가. 예를 들어 국민들의 화장지 수요는 측정할 수 있고, 이에 맞게 생산하기가 어려운 일인가.

▲ 초기 공산주의자들은 중앙정부가 모든 통계를 수집하고 과학적으로 분석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결과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화장지, 치약, 유리병, 주전자 등 수십만개 상품의 수요를 어떻게 파악하고 공급한단 말인가. 생산된 물건을 분배하는 것은 더 문제다. 어떤 동네 상점에는 맛있는 통조림이 있는데, 인접한 다른 지역에는 없는 경우가 꽤 있었다. 나는 학생 때 어머니와 여행을 많이 하다 보니 이런 것을 알 수 있었다. 분배는 수요 계산보다 더 어렵다. 생산자들은 생산만 하면 됐고, 상품 판매에 관심이 없으니 제대로 공급되지 않는 일이 생겼다.

1988년 8월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시위전대협이 1988년 8월15일 연세대에서 8.15 남북학생회담 출정 강행을 위해 교문 밖으로 진출하기 위해 시위를 벌이고 있다. [연합뉴스 사진]

-- 그런데 소련의 경우 1917년 볼셰비키 혁명 후 초창기에는 빠른 수준의 경제성장을 이루지 않았나.

▲ 1930년대 초부터 1950년대까지 그러했다. 국가가 노동력이라는 자원을 동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소련 정부는 먼저 협동 농장화를 통해 농민들이 낮은 임금으로 일하도록 했다. 이렇게 생산한 곡식을 수출하고, 그렇게 벌어들인 돈으로 해외에서 공업시설들을 사 왔다. 농민들 일부는 공장 노동자, 건설 노동자로 동원됐다. 당국은 이들이 굶어 죽지 않을 만큼만 식량을 제공했다. 이런 방식으로 소련은 일시적 고도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오래가지 못했다. 이런 쇠퇴 현상은 북한에서도 나타났다. 북한 사회주의 경제도 초기에는 괜찮았지만 1960년대 말부터 문제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 지속적 성장을 못하는 이유는.

▲ 추가로 동원할 자원, 즉 노동력이 계속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동력 투입단계 이후에는 경제의 효율성을 높여야 하는데, 사회주의 경제는 그게 잘 안된다.

-- 그래도 소련은 우주 과학기술 등에서 성과를 내지 않았나.

▲ 국가사회주의에서는 정부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몇 가지 분야에 자원을 집중할 수 있는데, 그런 분야는 성장할 수 있다. 그런데 그건 지도자들이 중시하는 몇 개의 분야뿐이다. 나머지 분야는 낙후된다. 예를 들어 소련은 유인 우주비행에서는 미국보다 빨랐다. 소련의 지도자들은 고전 음악에도 관심이 많았는데, 이 분야도 발전했다. 하지만 소련은 화장실에서 사용하는 화장지도 제대로 만들지 못했다.

연합뉴스와 인터뷰 중인 란코프 교수 윤근영 기자 촬영

-- 똑같은 시기 1980년대에 한국의 학생운동권은 소련식 사회주의(PD)와 북한식 사회주의(NL)를 지향하고, 그것이 진보라고 생각했는데.

▲ 한국의 386 학생 운동권이 지향했던 것과는 완전히 반대 방향의 흐름이 소련에서 일어났다. 소련 학생 운동권에게는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가 진보였다. 국가사회주의는 반동적 체제라고 생각했다. 국가사회주의를 지키려는 사람들을 보수파나 수구파로 불렀다. 동유럽 학생운동권도 마찬가지였다. 한국 학생들은 180도 다른 방향으로 갔던 것이다.

-- 당시 한국의 학생운동권은 왜 거꾸로 갔을까.

▲ 그때 한반도는 흥미로운 지역이었다. 북한만큼 심각하게 실패한 국가 사회주의는 없었다. 한국 자본주의만큼 크게 성공한 나라도 없었다. 극과 극이었다. 당시 학생운동권은 한국의 눈부신 경제성장을 주목하지 못했다. 외국에 나가서 다른 나라를 살펴볼 기회가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내부 빈부 격차에 주목했다. 그런데 객관적으로 보면, 한국의 빈부격차는 세계 기준에서 심각하지 않았다. 해방 직후 토지개혁과 6.25전쟁을 겪으면서 부자들이 힘을 잃었기 때문이다. 한국 권위주의 정권의 폭력도 다른 나라에 비해서는 약했다. 한국에서 정권의 폭력이 없지 않았지만, 칠레를 비롯한 다른 나라에 비해서는 높지 않았다.


-- 당시 한국 학생들도 역사의 진보를 원했는데.

▲ 1980년대 소련과 한국 학생 모두 희망은 비슷했다. 진보를 이뤄내는 것이다. 그런데 진보에 대한 관점이 달랐다. 한국 학생들이 생각했던 진보인 소련식 국가사회주의는 소련 학생들에게 반동적 경제체제였고, 특권 계급의 독재적 통치 수단이었을 뿐이다.

-- 진보란 무엇인가.

▲ 오늘날 진보를 이루는 사회는 기술 발전을 포함한 경제발전이 진행되고, 좀 더 평등한 분배가 이뤄지고, 인권과 자유가 개선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경제발전이다. 그런데 한국에서 진보라고 자칭하는 사람들은 오랫동안 경제 발전과 기술 발전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소련, 동유럽, 북한 등의 사회주의에서 문제가 생긴 것은 경제 발전이 없었기 때문이다.

keunyoung@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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