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연합뉴스) 김종우 선임기자 = "브라질의 나비 한 마리 날갯짓이 텍사스에 토네이도를 일으킨다." 미세한 변화가 거대한 시스템을 흔든다는 이른바 '나비효과'다. 정치 역시 예외는 아니다. 팸 본디 미국 법무장관은 2월 "(엡스타인) 리스트를 책상 위에서 보고 있다"고 말했다. 이 발언은 정치적 파장을 불러왔다. 법무부는 "그런 리스트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반박했다. 이 모순된 발언으로 수면 아래 있던 논란이 재부상했다. 보수 진영 내부에서도 예상치 못한 균열의 단초가 되고 있다.
문제의 리스트는 억만장자 금융인이었던 고(故) 제프리 엡스타인이 생전에 관리했다고 알려진 미성년자 성 접대 관련 인물들의 명단을 지칭한다. 그는 미성년자 성착취 혐의로 기소돼 수감 중 사망했다. 사인은 자살로 발표됐다. 하지만 이후 '타살설'과 '리스트 실재설'이 끊이지 않았고, 음모론의 소재가 돼왔다. 최근에는 정치권으로까지 파장이 번졌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18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2003년 엡스타인에게 보낸 편지를 보도했다. 외설적 그림과 축하 문구, '도널드' 서명이 포함됐다고 전했다.
트럼프는 WSJ와 루퍼트 머독을 상대로 100억 달러(약 14조 원)의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했다. 트럼프와 머독 간 갈등이 현실화된다면, 트럼프 행정부와 보수 매체 폭스뉴스 간 밀월 관계도 흔들릴 수 있다. 미국에서 공인을 상대로 한 명예훼손 소송은 '실질적 악의'(actual malice)를 입증해야 해 승소 가능성이 높지 않다는 게 중론이다. 이번 소송이 엡스타인과의 관계에 대한 의혹 자체를 해소하는 결과로 이어지지도 않을 전망이다. 정치적으로 보면 정부 투명성을 중시해온 트럼프 진영의 정체성과 충돌하는 딜레마에 가깝다. 핵심 지지층은 진실의 공개를 기대하지만, 트럼프의 모호한 대응은 그 기대와 상충한다.
이번 사안이 정치적으로 중요한 것은 트럼프 진영 내부에서 예민한 균열 조짐이 포착되고 있기 때문이다. 엡스타인 리스트는 트럼프 핵심 지지층에게 '은폐된 진실'의 상징처럼 여겨져 왔다. 진보 엘리트들과 글로벌 권력자들을 겨냥한 음모론이 응축된 사안이었기에 이들에게는 그 명단을 공개하고 단죄하는 건 정의의 수순이다. 하지만 트럼프와 엡스타인의 과거 교류가 재조명되고, 정부는 명확한 해명을 내놓지 않고 있다. 결과적으로 진영 내부에서 의심과 혼선이 나타나고 있다. 일부 핵심 지지자들 사이에서도 공개적인 비판의 목소리도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엡스타인 리스트를 둘러싼 법무장관과 법무부 간 발언 불일치는 단순한 해프닝이 아니다. 트럼프 정치연합의 내재적 모순이 수면 위로 떠오른 징후다. 이런 균열이 내년 중간선거에서 경합 지역 공화당 의원들에게 부담이 될 수도 있다. 견고해 보이는 권력일수록 방심하면 자신도 모르게 무너지는 법이다. 애초에 철옹성이라는 것은 없다. 트럼프는 투명성을 외치면서도, 불투명함을 감수해야 하는 정치적 자기모순에 빠진 형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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