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유신정권 탄압과 언론인들의 저항 조명

(서울=연합뉴스) 이세원 기자 = 1970년대 유신 체제에서 자유언론운동에 헌신한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 2대 위원장 안종필(1937∼1980) 기자의 삶을 재구성한 '동아투위 안종필 평전'(자유언론실천재단)이 출간됐다.
지역 신문사 기자로 일하다 기자협회보로 이직해 편집국장을 지낸 김성후 선임기자가 당시 상황을 보여주는 여러 자료와 안종필 유족이나 지인들의 증언 등을 토대로 권력의 억압에 맞선 한 언론인의 삶을 책으로 엮었다.
책은 부산일보와 조선일보에서 기자 초년기를 보내고 1966년 11월 동아일보로 이직한 안종필이 왜 자유언론 운동에 투신하게 됐는지를 시대적 배경과 함께 소개한다.
그가 동아일보로 옮긴 직후의 편집국은 활기가 넘쳤으며 기자들은 정의감과 자부심에 가득 차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박정희 정권은 정보기관을 동원해 언론사를 사찰하는 등 서서히 본색을 드러냈다. 예를 들면 1969년 9월 여당인 민주공화당(공화당)이 대통령의 3선 연임을 가능하게 하는 개헌안을 야당인 신민당이 농성 중인 국회 본회의장이 아닌 국회 제3별관 특별위원회실에 모여 날치기로 가결했을 때 중앙정보부는 기사 개입을 시도했다고 책은 전한다.
"편집하고 있는데 중앙정보부 김이 나타났다. 그는 내 곁에 앉더니 '변칙처리'를 '변칙통과'로 한 번만 봐달라고 했다."

정권의 압력이 거세지자 1974년 10월 24일 동아일보 기자들은 편집국에서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발표해 "신문, 방송, 잡지에 대한 어떠한 외부 간섭도 우리의 일치된 단결로 강력히 배제한다"는 방침을 천명했다.
이에 정권은 신문에 광고를 싣지 못하게 기업을 압박했고 이른바 '백지 광고 사태'가 벌어졌다. 경영이 어려워진 동아일보는 이듬해 3월 안종필을 비롯한 여러 기자를 줄줄이 해고했다.
해직된 이들은 출판·번역에 종사하거나 옷 가게·과일가게·양품점 등을 열기도 했지만, 장사가 잘되지 않아 폐업이 일쑤였다고 책은 기술한다.
안종필의 경우 청계천의 전기장판 공장, 의약품 자료집 출판사 등에서 일하다 권영자 동아투위 초대 위원장이 사의를 표명한 뒤 1977년 5월 2대 위원장으로 추대돼 자유언론 운동을 이어갔다.
그는 특히 신문에 실리지 않는 민주화 운동 사건을 모아서 '동아투위소식'에 '보도되지 않은 민주인권 사건일지'라는 이름으로 소개했다. 공안 당국이 눈엣가시로 여길 일을 굳이 한 이유는 그가 훗날 법정에서 한 발언에서 알 수 있다.
"우리는 기자입니다. (중략) 다만 잠깐 현장에서 타의에 의해 강제로 물러나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기자가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이 일지가 빌미가 돼 안종필을 포함한 동아투위 위원 10명이 구속됐고 이 가운데 7명이 긴급조치 위반 등의 혐의로 기소됐다. 이는 이돈명·홍남순 등 인권변호사 22명이 이들을 위해 나설 정도의 시국 사건이었다.
안종필은 1·2심에서 징역 2년에 자격정지 2년 판결을 받았다. 그는 박정희 사망 후인 1979년 12월 구속집행정지로 풀려났으나 급격히 건강이 악화해 간암 판정을 받았으며 이듬해 2월 29일 생을 마감했다.

책은 교도관들이 기록한 안종필과 면회자들과의 대화, 서신 검열 기록, 진료기록 등 풍부한 자료를 토대로 고인의 행적을 복원했다.
안종필 기자의 활동 외에도 권력이 얼마나 집요하게 언론을 통제하려 했는지, 당시 언론인들이 소명을 다하기 위해 어떻게 연대하고 싸웠는지도 책은 생생하게 조명한다.
이부영 동아투위 위원장은 발간사에서 안종필의 죽음을 "유신독재의 탄압에 의한 옥사(獄死), 자유언론의 순교자라고 불러야 마땅하다"며 "부디 한국 자유언론과 민주주의의 미래를 하늘에서도 걱정해주시길 빈다"고 말했다.
3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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