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은 2초 만에 반응, 5∼12세는 절반만 잠에서 깨 대피
기차 지나가는 85데시벨 경보 5분 넘게 울려도 못 깨어나
어린이 안전사고 47.4%는 가정에서 발생
기차 지나가는 85데시벨 경보 5분 넘게 울려도 못 깨어나
어린이 안전사고 47.4%는 가정에서 발생

[※ 편집자 주 = 지난 3월 인천에 이어 최근 부산에서 보호자 없이 집에 남겨져 있던 어린이들이 화재로 숨지는 사고가 잇달아 발생했습니다. 사고는 낡은 시설물 때문만이 아니라 돌봄 서비스를 제대로 제공하지 못하는 사회 시스템의 문제로도 볼 수 있습니다. 연합뉴스는 위험에 노출된 아이들의 사례를 소개하고, 어린이들의 안전한 성장을 위한 사회 돌봄망에 대해 점검하는 기사를 3회에 걸쳐 송고합니다.]

(부산=연합뉴스) 차근호 기자 = 화재는 어린이들이 일상에서 가장 쉽게 맞닥뜨릴 수 있는 위험으로 한 단 몇 분 만에도 생명을 위협하는 치명적인 사고다.
이런 위급 상황에서 화재경보기는 사람을 즉시 깨우고 대피하도록 유도하는 중요한 장치다.
하지만 보호자 없이 집안에 남겨진 아이는 경보에 반응하는 속도가 성인에 비해 크게 떨어진다.
'잠들었으니 괜찮겠지'하고 홀로 남겨 두는 것은 자칫 아이를 위험에 방치하는 행위가 될 수도 있다.
미국 소아학회지 'PEDIATRICS'에 2022년 게재된 '어린이 나이에 따른 화재 경보 신호 반응성 연구'(Age-Dependent Responsiveness to Smoke Alarm Signals Among Children)를 보면 이런 상황을 잘 알 수 있다.
연구는 5세부터 12세까지 아동 540명을 대상으로 깊은 수면에 들었을 때 화재 경보에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분석했다.
연구 결과는 충격적이다.
한국은 물론이고 미국에서도 가장 많은 형태인 '고주파(3000Hz 이상) 화재경보기'의 경우 20세에서 49세 사이의 성인은 소리가 울리자 평균 2초 만에 잠에서 깼고, 12초 만에 실험실 방 밖으로 탈출했다.
하지만 5∼6세 아이는 알람이 울려도 깨어나는 비율이 28.5%에 불과했고, 방 밖으로 나가는 비율도 27.6% 그쳤다.
7∼8세 아이는 깨어난 비율이 45.5%였고, 탈출한 비율은 43.3%였다.
9∼10세는 58%가 잠에서 깼고, 57.3%가 방 밖으로 나왔다. 11∼12세는 75.75%가 일어났으며 72.9%가 탈출했다.
5∼12세를 통틀어 평균 내면 절반이 조금 넘는 53.2%의 아이가 경보를 듣고 깨어나 51.5%가 방을 나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이들이 깨어나는데 걸리는 평균 시간은 107초였고, 탈출에까지 걸리는 시간은 278초였다.

고주파 경보기가 아닌 '저주파(500Hz) 경보기'나 '사람 음성 경보기', '저주파와 사람음성 혼합 방식'의 경보기는 조금 효과가 좋아 5세들도 66∼78%가 잠에서 깨어나고 탈출했으나 여전히 많은 아이가 스스로 대피하지 못했다.
화재 상황 시 보호자의 도움이 얼마나 중요한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어린이들은 심한 경우 5분 이상 깨어나지 못하는 사례도 있었다.
특히 8세 이하 어린이의 경우, 지하철 소음 수준인 85데시벨의 경보가 울리는데도 5분 이상 잠에서 깨어나지 못해 연구진이 강제로 깨워야 했을 정도다.
아동의 뇌는 깊은 수면 단계에서 성인보다 더 강력한 '느린 파동'을 나타낸다.
이러한 뇌파는 외부 자극에 대한 각성 임계치를 높여 경보음이나 외부 소음을 쉽게 무시하게 만드는 것으로 알려진다.
한국소방기술사회 박경환 회장 "대부분 공동주택에는 90데시벨가량의 경보기가 있지만 현관 밖에 설치돼 있어 화재 시 현관이나 방문을 통해 소리를 들어야 하므로 작게 전달될 수 있다"면서 "가정 내 비상 방송 스피커도 보통 1와트짜리가 거실에 1개 설치돼 있는데 방문을 닫고 들어가면 알아듣기 힘들 수도 있다"고 의견을 냈다.
화재뿐만 아니라 집에 혼자 남겨진 어린이를 위협하는 요소는 많다.
소방청에 따르면 2021∼2023년 발생한 어린이 안전사고 10만8천759건 중 절반에 가까운 5만906건(47.4%)이 집 안에서 발생했다.
학교(9천515건) 등 교육시설과 비교해 5배 이상 높은 수치다.
일반적으로 '집이 가장 안전하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지만 실제로는 집이 어린이 안전사고가 가장 많이 발생한 장소인 셈이다.
실제로 부모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추락, 질식, 감전 등으로 영유아가 숨지는 사례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어린이들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크고 작은 의료 응급상황을 겪을 수 있는데 만약 부모 부재 시 상황이 닥치면 적절한 조치 없이 위험이 방치될 수 있다.
고열이나 경련, 복통 등을 호소할 때 돌볼 사람이 없으면 골든 타임을 놓쳐 중증으로 악화할 수도 있다.
전문가는 위험에 대비한 아동 교육을 강조한다.
이동규 동아대학교 재난관리학과 교수에 따르면 미국 적십자는 '가정화재 캠페인'을 통해 각 가정에 무료로 연기경보기를 보급하고, 가족별로 '2분 탈출' 계획을 수립하고 훈련하도록 돕는 패키지형 지원 사업을 하고 있다.
조사에 따르면 참여 가구의 86%는 "아이도 대피 경로를 기억한다"고 답했다.
이 교수는 "한국도 돌봄 사각지대에 있는 가정을 우선 대상으로 삼아 경보기 설치와 대피 교육을 동시에 지원하는 모델을 만들면 좋겠다"며 "지자체와 민간 단체가 협력해 가정 내 안전 체계를 강화할 수 있다"고 밝혔다.
ready@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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