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위에 담긴 간절함 연구한 두 학자 문명대·전호태 교수
'크리스마스 기적' 같았던 두 차례 발견…"기하학 문양 심층 연구 필요"
"바위 신앙 담긴 현장…지역 주민과 공존하며 연구 중심지 거듭나야"
'크리스마스 기적' 같았던 두 차례 발견…"기하학 문양 심층 연구 필요"
"바위 신앙 담긴 현장…지역 주민과 공존하며 연구 중심지 거듭나야"

(서울=연합뉴스) 김예나 기자 = "여기 이 부분, 무엇으로 보이나요? 바로 배입니다. 모르고 지나치는 경우가 많죠. 그럼 이건요? 작살 맞은 고래로 보이나요?"
지난 3월 25일 서울 동국대 박물관 전시실 2층.
문명대(85) 동국대 명예교수가 전시실 한쪽 벽면을 채운 탁본(拓本·비석이나 기와 등에 새겨진 글씨나 무늬를 종이에 그대로 떠낸 것)을 가리키며 말했다.
가로 5m, 세로 2.2m 크기의 탁본에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고래사냥 그림이 기록돼 있었다. 그는 자신의 손길이 고스란히 남은 탁본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인류사를 다시 쓰게 한 바위그림, 반구대 암각화와의 재회였다.
저명한 불교 미술사학자인 문 교수에게 암각화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기억이다.
1970년 당시 동국대 박물관 전임연구원이던 그는 울산 지역의 불교 유적을 조사하던 중 12월 24일 천전리 일대에서 다양한 문양과 명문(銘文)이 새겨진 암각화를 발견했다.
선사시대부터 신라에 이르기까지 기나긴 시간을 담은 흔적이었다.

세상을 놀라게 한 발견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이듬해 12월 25일 동료 학자인 김정배(현 고려대 명예교수)·이융조(한국선사문화연구원 이사장) 교수와 반구천 일대를 조사하던 그는 또 다른 암각화와 마주했다.
뛰어난 풍광으로 예부터 많은 문인이 찾았던 명소, 반구대 아랫부분 바위에는 고래를 비롯해 거북, 상어, 물고기, 사슴, 호랑이 등 다양한 동물과 인물 그림이 새겨져 있었다.
"배를 가까이 갖다 대어 보니 성기를 노출한 채 춤추는 사람과 바다거북이 3마리, 그리고 새끼를 등에 태운 고래 머리 부분만 물 밖으로 노출되고 있을 뿐…."(문명대 '울산 반구대 암각화' 중에서)

훗날 국보가 된 두 암각화는 세계적으로도 가치를 인정받아 26일 유네스코 자문·심사기구인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이코모스)로부터 '등재 권고' 판단을 받았다.
이코모스 측은 "탁월한 관찰력을 바탕으로 그려진 사실적 그림과 독특한 구도는 한반도에 살았던 사람들의 예술성을 보여준다"며 "다양한 고래와 고래잡이의 주요 단계를 선사인들의 창의성으로 풀어낸 걸작"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선사시대부터 약 6천 년에 걸쳐 지속된 암각화의 전통을 증명하는 독보적인 증거"라고 덧붙였다.
문 교수는 연합뉴스와 통화에서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천전리 명문과 암각화는 우리 역사·문화가 집약된 유산"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그야말로 역사적 발견이었다"며 "바위에 가까이 다가갔을 때 처음으로 눈에 들어온 춤추는 사람, 작살 맞은 고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고 떠올렸다.

문 교수는 특히 천전리 명문과 암각화와 관련해 "반구대 암각화의 고래 사냥 그림은 모두가 주목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천전리의 여러 기하학 문양"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다양한 기하학 문양은 옛날부터 내려오는 고대 문자일 가능성도 있다"며 "세계유산 등재를 계기로 장기적인 관점에서 연구가 이뤄져야 한다"고 제언했다.
대곡리와 천전리 두 암각화가 주목받는 데는 전호태(66) 울산대 명예교수의 노력이 큰 역할을 했다.
선사 미술 전문가인 그는 1988년 대곡리 암각화와 처음 인연을 맺은 뒤, 울산대 반구대암각화유적보존연구소를 설립해 정밀 실측 조사와 연구를 해왔다.

암각화 관련 연구서와 교양서, 연구 논문을 발간한 것만 해도 30편이 넘는다.
전 교수는 연합뉴스와 통화에서 "반구천의 암각화는 수천 년에 걸쳐 바위에 새김 작업이 이뤄진 바위 신앙의 생생한 현장"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바위에 선을 긋거나, 면을 쪼고 갈아서 형상을 나타내는 건 쉽지 않은 작업이다.
그는 바위그림을 '반쯤 영원성을 갖춘 그림'이라고 설명했다. 이런 그림이 긴 시간 동안 다양한 사람들에 의해 제작돼 왔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반구대 암각화만 해도 뭍짐승을 사냥하던 사람들, 고래잡이가 생업이던 사람들, 맹수를 경외하던 사람들이 서로를 알지 못한 채 오랜 기간 여러 세대에 걸쳐 자신들의 생업과 관련이 깊은 존재를 익숙한 기법으로 새겨 형상화했다."(전호태 '반구대 이야기' 중에서)
전 교수는 세계유산 등재는 또 하나의 '시작'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지역 주민이 중심이 돼 세계유산을 보존·관리하는 기틀이 마련돼야 한다"며 "세계 곳곳의 암각화를 연구·조사하는 통합 기관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2008년 울산암각화박물관이 개관했으나 전문 연구자는 2명뿐"이라며 "세계유산 등재 이후 상황을 면밀히 관리하려면 연구 기능이 강화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yes@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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