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일 세계 초연…감동 안긴 대본·전자음향 입힌 음악 돋보여

(서울=연합뉴스) 이용숙 객원기자 = 타악기의 연타로 시작한 영화 음악적인 서곡은 극의 강렬한 긴장을 예고했다. 극단적 기상이변으로 고통받는 어느 고대 왕국의 서사가 동일한 문제에 직면한 관객의 눈과 귀를 사로잡았다.
지난 25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세계 초연의 막을 올린 호주 작곡가 메리 핀스터러의 '더 라이징 월드(The Rising World): 물의 정령'은 대본과 음악이 치밀하게 직조된 매혹적인 창작물이었다.
작품은 물의 정령이 몸속으로 들어간 뒤 이상증세를 보이며 왕국에 각종 이변을 불러온 공주를 물시계 장인이 자신의 목숨을 던져 구하고 왕국에 평화를 가져온다는 내용이다.
"이야기가 오래된 것일수록 현대적인 기술과 사운드, 아이디어를 펼치기에 더 좋은 무대가 된다"는 대본 작가 톰 라이트의 말은 설득력이 있었다.
그 오래된 이야기의 넓은 스펙트럼 속에서 작곡가는 르네상스 사운드에 현대의 화성과 전자 음향까지 입혀 오케스트라와 목소리의 울림을 새롭게 창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음악은 현악 파트가 비교적 단조로운 반면 타악 파트가 상당히 복잡하고 다채로웠다. 이는 연주하는 입장에서 어렵지만, 관객에겐 아름답고 수월하게 들리는 효과를 낳았다.
특히 중세 교회선법과 르네상스 가곡 풍을 사용한 음악, 복잡한 장식음이 붙은 성악 멜로디 등이 관객들을 아득한 옛 시대로 데려가는 효과를 냈다.

지휘자 스티븐 오즈굿은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현대 창작 작품을 지휘한 경험을 살려 생소한 초연작을 만난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를 유연하고 박진감 있는 연주로 이끌었다. 솔리스트들에 화답하는 노이 오페라 코러스의 정교하고 웅장한 합창은 극의 밀도와 집중도를 더욱 높였다.
핀스터러가 현을 뜯는 발현악기인 거문고를 마치 타악기처럼 사용한 점은 다소 아쉬움을 남겼다. 물론 거문고가 타악기의 효과를 낼 수 있는 독특한 특성을 지녔지만, 거문고의 고유한 음향과 음색을 더 깊이 있게 활용했으면 하는 인상을 남겼다.
비록 예술의전당이 세계 진출을 염두에 두고 호주 창작진에게 의뢰한 영어 오페라지만, K-오페라를 표방한 작품인 만큼 작곡가가 더 다양한 국악기를 사용할 수 있었다면 더욱 바람직했을 것이다.

라이트의 대본은 질문을 던지고 궁금증을 증폭시키면서 긴장을 끌어올리다가 정점에서 답을 내놓았는데, 한국 창작 오페라 작가들에게도 좋은 모델이 될 수 있는 대본이었다.
라이트가 관객의 감동을 끌어내는 빌드업 방식 역시 탁월했다.
물의 정령을 유인해 공주의 몸에서 끌어내려던 첫 번째 시도가 실패로 돌아간 장면에 이어 물시계 장인과 제자(테너 로빈 트리츌러 분)는 높은 곳에서 물에 잠긴 도시를 내려다본다. 이때 제자가 들려주는 '사마귀와 기생 생물체'에 관한 어린 시절 기억이 극의 전환점을 이룬다.
그러나 이 기억이 장인에게 문제 해결의 열쇠로 기능하는 까닭은 '기생 생물체가 곧 물의 정령'이라는 깨달음뿐만 아니라 장인이 공주에게 느끼는 깊은 연민 때문이다.
대본작가는 공주의 이상증세를 논하는 왕실회의 장면에서부터 공주에 관한 정보를 치밀하게 쌓아 올려 장인의 연민도 그에 상응해 점점 커지게 만들었고, 마침내 물의 정령을 마주하는 클라이맥스에서 그 연민의 힘을 폭발시켰다.
물시계 장인을 여성으로 설정한 것 역시 적절한 기획이었다.
'엄마 없는 공주의 외로움과 고통에 모성애적 연민을 느낀 장인이 물의 정령을 끌어안고 물시계에 영원히 봉인되는 희생적 선택을 한다'는 설정이 관객에게 깊은 감동을 안겼다. 쉽지 않은 시적, 철학적 텍스트를 이해하기 쉽게 번역한 드라마터그(dramaturg) 이단비의 역할도 컸다.

장인 역의 메조소프라노 김정미는 이번 공연에서 가장 설득력 있는 감동의 주역이었다. 제자 역을 맡은 미성의 테너 트리츌러와의 케미스트리(호흡)도 탁월했다.
트라우마를 딛고 훌륭한 통치자로 성장한 공주 역의 소프라노 황수미, 고뇌하는 왕 역의 베이스바리톤 애슐리 리치, 그리고 모든 조역이 스티븐 카르의 연출에 호응해 아쉬움 없는 가창과 연기를 펼쳤다.
돌과 물의 질감을 생생하게 살린 찰스 머독 루카스의 무대, 극의 분위기에 정확히 어울린 김환의 의상, 협력연출 조은비의 세심한 소통력, 효과적인 조명과 프로젝션 역시 작품의 완성도를 더욱 높였다.
공연은 오는 29일과 31일에도 같은 장소에서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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