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우주탐사 분야 등 협력 모색키로…美국무 "멋진 기회"
바이든 '러시아 고립' 기조 폐기…"수십년 대러정책서 가장 충격적 전환"
바이든 '러시아 고립' 기조 폐기…"수십년 대러정책서 가장 충격적 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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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서혜림 기자 = 18일(현지시간)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개최된 미국과 러시아의 회담은 그동안 얼어붙었던 양국 관계의 극적인 변화를 예고한 자리로 평가된다.
마코 루비오 미국 국무장관과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 등이 대좌한 이날 회담에서 양측은 우크라이나 종전 방안을 다룰 고위급 협의체 구성을 합의했다.
나아가 양국 대사를 신속히 임명하고 외교 공관 운영을 정상화하는 데에도 의견을 모았다.
양측이 우크라이나 전쟁 종식을 위한 협상에 첫 단추를 끼운 것을 넘어 관계를 정상화하겠다는 의지를 강조한 것이다.
이날 합의는 미국의 전통적인 대러 외교 정책의 180도 전환을 가리키는 '시그널'로 평가된다.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NYT)는 "트럼프 대통령이 여러 세대에 걸쳐 한 번 있을까 싶은 충격적인 변화를 미국의 외교 정책 부문에서 실행하고 있다"고 짚었다.
그러면서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대통령들은 잠시의 데탕트를 거쳐 러시아를 경계해야 할 적으로 봤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러시아를 미래의 협력자로 여기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이는 2022년 2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뒤 경제적 제재와 우크라이나 무기 지원 등으로 러시아를 철저히 고립시킨 전임 조 바이든 행정부의 정책을 완전히 뒤집는 것으로 평가된다.
이같이 달라진 미국의 기조는 트럼프 대통령의 더 강력해진 '미국 우선주의'를 반영한 것으로 풀이된다.
전쟁을 일으킨 러시아에 책임을 묻기보다 이들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경제적 이익을 십분 취하겠다는 계산에 따라 대러 외교 방향을 틀었다는 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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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이날 회담에서 양측은 구체적인 경제협력 방안을 논의한 것으로 보인다.
루비오 장관은 이날 지정학·경제적 측면에서 "러시아와 협력할 수 있는 멋진(incredible) 기회"를 모색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러시아 외무부는 양국이 에너지, 우주탐사 등을 포함한 경제 협력을 재개하기 위한 대화를 시작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대표단에 키릴 드미트리예프 러시아 국부펀드 러시아직접투자펀드(RDIF) 대표가 포함된 것도 주목된다.
그는 회담 전 인터뷰에서 "미국의 주요 석유 기업들은 러시아에서 매우 성공적인 사업을 해왔다"며 "우리는 언젠가는 그들이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러시아가 준 천연자원에 대한 접근 기회를 그들이 왜 포기하겠나?"라고 말했다.
경제 협력과 연계해 서방의 대(對)러시아 제재 완화 문제를 협의했을 가능성도 거론된다.
라브로프 장관은 회의와 관련해 "호혜적인 경제 협력 발전을 막는 인위적 장벽을 제거하는 것에 대한 강한 관심이 있었다"고 말했다.
루비오 장관도 회담 후 전쟁을 종식하기 위해서는 모든 당사자의 양보가 필요하다며 "유럽연합(EU)도 러시아에 대한 제재를 하고 있기 때문에 일정 시점에 협상 테이블에 나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일각에선 미국의 대러 밀착 행보가 중국 견제를 위한 포석일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미국과 중국의 전략적 경쟁이 가속하는 가운데 러시아를 끌어안아 중국과 러시아의 협력 관계를 느슨하게 만들겠다는 전략이라는 평가다.
이를 두고 냉전 시대 리처드 닉슨 당시 대통령이 중국에 파격적으로 손을 내밀며 소련을 압박하려 한 전략을 거꾸로 활용하는 게 아니냐는 관측도 있다.
이날 양측의 회담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된 것으로 전해졌다.
드미트리예프 대표는 러시아의 한 방송 인터뷰에서 "농담이 많이 오갔고, 식사도 매우 맛있었다"고 회담 표정을 전했다.
라브로프 장관도 "우리는 상대의 말을 그저 들은 것이 아니라, 서로 경청했다"며 회담에 만족감을 표했다.
다만 전문가들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에 사실상 '면죄부'를 주는 트럼프 대통령의 새 접근법에 우려를 표했다.
싱크탱크 미국기업연구소(AEI)의 코리 샤케 대외·국방정책 국장은 "미국 외교 정책 80년사의 수치스러운 전환"이라며 "우리는 영향력 확장을 위해 침략하는 행위를 정당화하고 있다. 지난 80년 동안의 모든 미국 대통령들이 트럼프 대통령의 메시지에 반대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NYT는 "트럼프 대통령은 이웃국가에 대한 부당한 침략으로 수십만 명을 학살한 푸틴 대통령에 대한 고립을 끝낼 것이란 점을 분명히 했다"며 "대신 그는 러시아를 국제사회에 다시 편입시켜 미국의 최고 우방 중 하나로 만들고 싶어한다"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이번 광범위한 협상은 파괴적인 전쟁을 일으킨 러시아를 처벌하려는 서방의 노력을 저버리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hrse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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