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트 '초절기교'로 전국투어 "음악, 산과 같아…두렵다고 피할 수 없어"
"윤찬이는 내 말 그냥 지나치지 않아…들라크루아 일기 추천하니 금세 읽어"
"자기만족 하는 순간 도태…늘 새로움 추구하는 게 피아니스트 숙명"
"윤찬이는 내 말 그냥 지나치지 않아…들라크루아 일기 추천하니 금세 읽어"
"자기만족 하는 순간 도태…늘 새로움 추구하는 게 피아니스트 숙명"

(서울=연합뉴스) 김용래 기자 = 피아니스트 손민수(46·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교수)는 요즘 본인의 이름보다 '임윤찬의 스승'이라는 타이틀에 더 익숙하다.
세계적인 권위의 미국 반 클라이번 국제피아노콩쿠르에서 임윤찬(18)이 지난 6월 18세의 나이로 역대 최연소 우승으로 스타덤에 오르면서 스승인 그도 덩달아 더 분주해졌다. 그는 임윤찬이 포디움에 오르기 직전 결혼식을 올렸는데 선물처럼 날아든 제자의 우승 소식에 신혼여행 일정까지 미뤄야 했다.
임윤찬은 평소 가장 존경하는 인물을 물으면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늘 손민수 교수를 꼽아왔다.
우승 직후 귀국 간담회에서도 "음악뿐 아니라 한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가르쳐주신 분으로 제 인생의 모든 것에 영향을 주셨다"고 존경심을 표했다.
손민수가 '피아노 선생'의 자리를 잠시 내려놓고 피아니스트로 돌아와 리스트의 '초절기교 연습곡' 전곡 연주 프로그램으로 관객들을 만난다.
이 곡은 너무 어려워 전문 연주자 사이에서도 '기절기교'로 불릴 정도로 고난도 테크닉이 요구되는 작품. 임윤찬도 반 클라이번 콩쿠르 준결승에서 이 초절기교 연습곡의 12곡 전곡을 역동적으로 연주해 화제가 됐다.
손민수는 지난 3일 여수 GS칼텍스 예울마루를 시작으로 24일 남양성모성지 대성당, 내달 16일 예술의전당 공연에 이어 12월까지 대구, 제주, 부산, 광주 등지에서 초절기교 전곡 연주회를 연다.
지방 연주를 마치고 전날 밤늦게 귀경했다는 그를 지난 7일 서울 서초동 한예종 캠퍼스에서 만났다.
두 대의 스타인웨이 그랜드피아노가 나란히 정북향으로 놓인 연구실에선 멀리 북한산 능선이 한눈에 펼쳐졌고, 한쪽에는 미국 유학 시절 인연을 맺은 평생의 스승 러셀 셔먼·변화경 부부의 사진과 러셀의 '피아노 이야기' 한 권이 가지런히 책상에 놓여있었다.
보스턴의 뉴잉글랜드음악원 석좌교수인 셔먼은 피아니스트 변화경의 남편으로, 연주자들에게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에 기반한 철학 있는 연주를 강조해 '건반 위의 철학자'로 불리는 피아니스트 겸 교육자다.

--셔먼의 책 '피아노 이야기'가 책상에 있는 게 눈에 띈다.
▲ 학생들이 연습하다가 쉬면서 한 자라도 읽게끔 잘 보이는 곳에 뒀다. 읽기 쉬운 책은 아니지만… 셔먼·변화경 선생 부부의 가르침이 내 인생을 바꿔놨다. 가르칠 때 기교나 테크닉을 말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한번도 없다. 늘 토머스 불핀치의 '그리스로마 신화'의 내용을 소개하시던 게 기억에 남는다. 신화 속 희비극들을 통해 인간에 대한 통찰을 항상 강조하셨다. 하버드 등 명문대가 모인 보스턴이라는 도시의 특성상 셔먼·변화경 클래스에는 인근 대학 인문학 전공 교수들의 특강이 무척 많았다. 당시 서너 시간 동안 이어진 단테 '신곡' 강의도 인상 깊었다.
--임윤찬도 단테의 '신곡'을 거의 외울 정도로 여러 번 읽었다고 하지 않았나.
▲ 내 인문학적 소양이라는 것은 셔먼·변화경 선생 두 분에게 비할 바는 못 된다. 내가 두 분의 그림자 안에 있으니 그 실루엣만이라도 윤찬이에게 전달되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윤찬이는 내가 평소 하는 말을 지나치는 법이 없다. 말없이 듣고 피식 웃고 넘기는데 나중에 보면 실행에 옮긴다. '신곡'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최근 윤찬이에게 프랑스 19세기 화가 들라크루아의 일기를 추천해줬다. 들라크루아의 예술과 삶에 대한 생각들이 담긴 책인데, 아마 국내에 번역이 안 됐을 거다. 영문판을 소개해줬더니 며칠 있다가 메시지가 왔더라. '선생님, 이 책은 제가 여태까지 읽었던 것 중 제일 재미있어요!'라고. 윤찬이는 그런 학생이다.

--요즘 '피아니스트 손민수'보다 '임윤찬의 스승'으로 더 알려진 것 같다.
▲ 제자가 잘 된 건 정말 좋은 일이다. 임윤찬 신드롬이라고 해야 할까, 덩달아서 선생인 나를 궁금해하는 분도 많아졌고. 처음엔 '어 뭐지?' 했는데 지금은 학생들을 열심히 가르치며 내 음악의 길을 계속 찾고 있고, 달라진 건 없다. 경연(콩쿠르)이 복권 비슷하다고 흔히들 말한다. 실력뿐 아니라 운이 따라줘야 하고, 성공도 해보고 실패도 해보고, 그 속에 연주자들의 온갖 애환이 있다. 그것을 초월해 자기 세계를 잃지 않는 이들이 계속 음악의 길을 가는 것이고… 윤찬이가 (반 클라이번 우승으로) 가장 좋은 건 이제 본인의 음악에 대한 마음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됐다는 점이다. 콩쿠르 졸업으로 자신의 길을 개척하면 되니까.
--연주자들이 세계적인 콩쿠르에서 우승하고 반짝하다가 사라지는 경우도 있다. 30대를 거쳐 40대로 넘어가면서 무대에 보이지 않는 이들도 있고. 현재 주목받는 우리 젊은 연주자들이 오래 사랑받으며 음악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 음악은 미지의 세계에 있는 생명체와 같다. 끊임없이 새로움을 추구해가는 과정이다. 수많은 연습과 연주, 여행, 사람들과의 만남 같은 것을 통해 (음악의) 생명을 계속 살리고 호흡을 불어넣는 게 쉽지 않은 일이다. 반짝였던 인재들이 사라지기도 하고 한참 지나 다시 음악의 생명을 되찾아 나타나기도 한다. 피아니스트라는 직업은 숙명적으로 마지막까지 나를 디벨럽(개발)해야 하는 작업이다. 그렇지 않고 자기만족을 하는 순간 도태되고 고인 물이 된다. (음악에 있어서) 내가 알지 못하는 저 멀리 어떤 것을 늘 추구하고, 호기심을 잃어선 안 된다. 그게 숙명이다.

--미국에서 학업을 마치고 미시간주립대에서 가르치다 2015년 귀국했는데 귀국 결정이 쉽진 않았을 것 같다.
▲ 18세에 미국에 갔으니, 귀국 당시 한국보다 미국에 더 오래 살았다. 제안이 온 뒤 고민하며 셔먼 선생님과 상의했더니 "인재들이 있는 곳으로 가야 한다"라고 간단하게 말씀하시더라. 김대진 선생님(현 한예종 총장)과 통화할 때도 "같이 연주 한번 해야지" 하며 여러 말씀을 하시는 데 마음이 움직였다. 한예종에 와서 한국 학생들을 가르쳐보니 반짝이는 별들이 정말 많더라. 지금은 그저 감사한 마음이다.
--2008년 사고로 손을 다친 뒤 꽤 오랜 기간 연주를 못 한 것으로 안다.
▲ 오른손이 부러지고 3년은 아예 피아노를 손에 대지 못했고, 왼손도 상하기 시작해 겨우 연주와 재활을 이어갔다. 사실 그때 얘기를 잘 안 한다. 베토벤이 쓴 편지들을 보면 여러 육체의 고통 속에서도 예술혼을 불태우지 않는가. 그런 와중에도 베토벤은 그런 곡들을 썼는데 내 고통쯤이야…작년 초 베토벤 소나타 전곡 연주를 마치면서 점점 덜 아파지기 시작해 이제는 괜찮다. 좋아하는 바이올리니스트 루돌프 콜리슈(1896~1978)도 "음악은 고통"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학생들에게도 자주 하는 말이다.
--리스트의 초절기교 연습곡은 어떤 곡인가. 왜 이 프로그램을 택했나.
▲ 연습곡(에튀드)으로 유명한 게 쇼팽과 리스트인데, 쇼팽이 각 손가락의 역할에 대해 연습곡마다 구분지어서 그 부분을 집중적으로 표현하려 했다면, 리스트는 피아노라는 악기의 표현 범위나 색채감을 12개 연습곡을 통해 극대화해 표현하려 했다. 초절기교 연습곡은 어려서부터 동경해온 곡인데, 스승 셔먼 선생님도 일생을 거쳐서 이 곡을 연주했다. 2000년대 초반 70대 중반 나이로 DVD 작업을 하셨는데 그때 나도 함께 밤을 새우며 녹음을 지켜봤다. 한 번에 전곡 연주를 하는데 한 시간 넘게 걸리는 곡을 세 차례 연속으로 하시더라. 그때 본 그 에너지는 내 음악 인생에 있어서 잊을 수 없는 경험이었다. 나도 언젠가 반드시 해야 한다는 생각을 그때 했다.
등반가가 높은 산을 오를 때 자신만의 루트를 택하기도 하기에 개개인이 보는 산의 모습은 천차만별일 것이다. 음악도 그런 면에서 산과 비교할 수 있다. 스승을 생각해서라도 (이 곡이) 두렵다고 피할 수는 없다. 최근 이 곡을 공부하면서 두려움은 없고, 단지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뿐이다.(웃음)
yonglae@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