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낙서로 얼룩진 경복궁…매직으로 '트럼프' 쓴 70대 붙잡혀(종합2보)

(서울=연합뉴스) 김예나 기자 = 지난 2023년 말 스프레이 낙서 '테러'로 한차례 곤욕을 치렀던 경복궁이 또다시 낙서로 얼룩졌다.
해마다 수많은 관광객이 찾는 우리나라 대표 문화유산인 경복궁에 낙서 사건이 또 발생하면서 국가유산 관리가 부실한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국가유산청은 11일 출입 기자단에 보낸 문자 공지에서 "오전 8시 10분경 경복궁 광화문 석축에 낙서를 한 사람을 발견해 경찰에 인계했다"고 밝혔다.
국가유산청에 따르면 이날 오전 광화문 인근을 순찰하던 궁능유적본부 경복궁관리소 소속 근무자가 낙서하던 김모(79) 씨를 확인했다.

이후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이 김씨를 현행범으로 체포해 조사 중이다.
김씨는 광화문에 있는 3개의 홍예문 가운데 좌측과 중앙 사이에 있는 무사석(武沙石·홍예석 옆에 층층이 쌓는 네모반듯한 돌)에 검은 매직으로 글을 쓴 것으로 조사됐다.
그는 '국민과 세계인에 드리는 글'이라고 쓴 뒤 그 아래에 '트럼프 대통령'이라고 쓰던 중 경복궁관리소 관계자에게 적발된 것으로 알려졌다.
글자가 적힌 범위는 가로 약 1.7m, 세로 0.3m에 달한다.

국가유산청은 이날 오전 광화문 앞에 가림막을 설치하고 작업을 시작한 지 약 7시간 만에 낙서를 제거했다.
궁능유적본부 측은 "문화유산 보호를 위한 보수 공사 중"이라며 "작업 중 안전 등의 문제로 관람을 통제하오니 양해해주시기를 바란다"고 안내했다.
현장에서 본 낙서는 생각보다 큰 편이었다. '국'이라고 적힌 글자는 성인 손바닥만 한 크기였고, 시간이 지나면서 석재 표면으로 일부가 스며든 모습이었다.
국립고궁박물관 유물과학과 소속 보존 처리 전문가 5∼6명이 동원됐으나, 약품으로 쉽게 지워지지 않아 오후 2시께 레이저 기기를 동원해 제거 작업에 나섰다.

외부에서 기기를 대여하는 경우, 하루 비용만 해도 상당한 것으로 전해졌다.
광화문은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총독부 청사를 지으면서 건춘문 북쪽으로 옮겼다가 한국전쟁 때 폭격을 맞아 문루가 소실됐고, 이후 복원한 것이다.
경복궁은 1년 8개월여 전에도 낙서로 오염된 바 있다.
지난 2023년 말 10대 청소년이 '낙서하면 300만원을 주겠다'는 말을 듣고 경복궁 영추문과 국립고궁박물관 주변 쪽문에 스프레이 낙서를 남겨 사회적 공분을 샀다.

국가유산청은 당시 이 낙서를 지우는 데 약 1억3천100만원이 쓰인 것으로 보고 있다.
미성년자를 상대로 경복궁 담장 낙서를 사주한 30대 남성은 중형을 선고받았으며, 10대 낙서범 역시 장기 2년, 단기 1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사건이 벌어진 지 얼마 되지않아 모방 범죄를 저지른 20대 남성에게도 징역형의 집행유예 판결이 내려졌다.
경복궁의 얼굴인 광화문 바로 아래에서 낙서가 또 발생하면서 국가유산 관리에도 빨간불이 켜졌다.

국가유산청은 경복궁 낙서 사건 이후 야간 순찰을 확대하고, 외곽 담장을 비추는 폐쇄회로(CC)TV를 증설하는 내용의 대책안을 내놓았으나 또 다른 낙서를 막지 못했다.
광화문은 이른 시간에도 수많은 관광객은 물론, 시민들이 오가는 장소라는 점을 고려하면 관리가 부실했던 것 아니냐는 아쉬움이 남는다.
경복궁관리소 측은 낙서 제거 작업을 위해 오후 1시에 예정돼 있던 광화문 파수 의식을 취소했으며, 수문장 교대 의식은 약식으로 진행했다.
국가유산청은 경복궁을 훼손한 행위에 대해 엄정 대응한다는 방침이다.

현행 '문화유산 보존 및 활용에 관한 법'에 따르면 문화유산에 낙서를 한 사람에게는 원상 복구 명령을 내릴 수 있으며 복구에 필요한 비용을 청구할 수 있다.
허민 국가유산청장은 "근무자가 현장에서 상황을 파악하고 즉각 조치한 것"이라며 "우리 문화유산을 훼손하는 행위는 용납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국가유산청은 향후 기상 상황 등을 고려해 일주일 정도 낙서를 제거한 부분을 살펴볼 예정이다.

yes@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