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연합뉴스) 이세원 기자 = 애인의 생일을 앞두고 손 편지를 쓰다가 글자체가 예전만 못하다고 느끼는 경우가 있다. 펜을 쥔 손가락과 손목을 종이 위에서 미세하게 움직이는 동작이 키보드를 두드리거나 화면을 터치하는 것으로 대체되면서 생긴 영향을 실감하는 순간이다. 하지만 문자를 '쓰는' 대신 '입력'하게 되면서 현대인이 잃어버린 것은 개성 있는 필체만이 아닐 수도 있다. 종이에 글자를 적는 행위는 디지털 기기에 문자를 입력하는 것과는 여러 측면에서 다르기 때문이다.
종이 문화사 학자인 롤런드 앨런은 신간 '쓰는 인간'(상상스퀘어)에서 종이나 노트에 쓰는 행동이 인간의 창의성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나아가 문명의 발전에 어떻게 기여했는지를 고찰한다.
책에 따르면 어떤 글을 그대로 베껴 쓰는 행위는 필사자가 그 내용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방식을 달라지게 한다. 예를 들어 시나 편지를 옮겨 적는 사람은 단어 선택, 어순의 미세한 부분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여러 번 읽을 수밖에 없으며 결과적으로 "더욱 친밀하고 유의미한 경험"을 한다.

종이에 쓰는 행위는 경제활동에서도 큰 변화를 유발했다. 종이가 일반화되기 전인 1244년 무렵 이탈리아 상인들은 거래 내역을 양피지에 기록했다. 양을 비롯한 동물 가죽으로 만드는 양피지의 경우 한 마리에서 고작 몇장이 나올 뿐이고 가격도 비쌌다. 게다가 양피지는 표면에 잉크가 말라붙기 때문에 긁어내고 다시 쓸 수 있다. 이는 양피지로 장부를 만들면 조작할 여지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측면에서 종이는 혁신적인 발명품이었다. 종이에는 잉크가 스며들기 때문에 적힌 내용을 수정하기 어렵다. 종이를 묶어 원장(元帳)을 만들고 쪽수를 매겨놓으면 특정 부분을 위변조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해진다. 아랫사람들이 장부를 조작해 횡령할 것이라는 우려가 줄어들자 무역상이 위임할 수 있는 업무 범위가 늘어났고 사업도 확대할 수 있게 됐다고 책은 전한다.
책은 레오나르도 다빈치, 렘브란트, 마리 퀴리, 제프리 초서, 찰스 다윈, 애거사 크리스티 등 유명인들이 무엇을 노트에 기록했고 이것이 어떤 식으로 이들의 지적·문화적 성취로 이어지는지도 살펴본다.
아이작 뉴턴(1642∼1727)의 노트는 그의 성장과 학문에 관해서 많은 것을 알려준다. 뉴턴이 16∼17세 무렵에 2펜스를 주고 산 작은 백지 노트에는 책에서 읽은 소묘에 관한 요령, 유리를 자르는 방법, 흑사병 치료제에 관한 정보, 친구에게 쓴 편지, 직선 삼각형의 분할에 관한 대수 방정식 등 그가 장래 이룰 지적 능력을 암시하는 여러 사항이 적혀 있다. 케임브리지대 1학년 말에 쓰기 시작한 노트를 보면 뉴턴의 불같은 성격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는 내용이 담겨 있다고 한다.

다빈치도 빼놓을 수 없는 메모광 중 한명이었다. 그는 1년에 약 1천 페이지 분량의 노트를 썼다. 소묘, 도해, 좌우를 뒤집어써서 거울에 비춰봐야 해독이 가능한 '거울 글씨'로 노트를 도배하다시피 했다. 그는 뭔가를 분석적으로 보는 가장 좋은 방법이 그리는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며 파도, 소용돌이, 회오리, 거품, 개울 물살, 와류 등 다양한 물의 모습을 그렸다. 시신 30구가량을 열어보고 골격, 척추, 손과 발의 뼈를 그리며 해부학적인 성과를 남기기도 했다. 그는 다양하게 관찰하고 언어로 표현했다. 다빈치가 남긴 어떤 노트에는 물의 움직임을 관찰한 730가지 그림과 이를 묘사하는 67가지 단어가 등장한다. 노트에 그리거나 쓰는 행동은 그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동료였던 루카 파치올리는 다빈치가 자기 생각을 보다 제대로 다루기 위해 종이에 적어서 외재화하고 있다는 것을 금세 알아차렸을 것이라고 책은 설명한다.

영화 '대부' 3부작을 만들고 5차례에 걸쳐 아카데미상을 받은 저명한 미국 감독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는 대학에서 연극예술을 공부하던 시절 자기만의 방식으로 연극 대본을 개조해 노트를 만들었다.
대본집의 제본을 풀어서 가장자리에 종이를 덧대 확장한 뒤 구멍을 뚫어 링 제본을 해서 자신만의 '프롬프트 북'을 만들었다. 그는 새로 생긴 여백에 장면 전환, 조명 신호, 배우들의 등장과 퇴장 등을 추가로 메모하며 작품을 변모시켜 나갔다.
종이 노트가 디지털 도구보다 효과적인 학습 도구가 된다는 사실을 보여준 신경학 연구자들도 있었다. 여러 연구에 따르면 강의 내용을 노트북 컴퓨터에 입력하는 학생들은 펜과 종이로 기록하는 이들만큼 잘 배우기 어려운 것으로 밝혀졌다고 책은 전한다. 그리고 오래되고 단순한 기록 도구가 지닌 강력함 힘을 찬양한다.
"디지털 도구가 더 저렴해지고, 더 번지르르해지고, 각종 기능이 더 풍성해지는 바로 그 순간에도 우리 가운데 점점 더 많은 이들이 종이 노트에 의지하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중략) 백지에 마음을 터놓고 그것과 소통하는 데는 에너지가, 그리고 때로는 약간의 용기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 보상은 아마 놀랄 만한 것일 테다."
손성화 옮김. 5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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