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 낱장→8폭 화첩 복원…고급 안료 사용·기법 등도 확인
뱅크오브아메리카 '예술작품 보존 프로젝트' 국내 첫 지원 대상
뱅크오브아메리카 '예술작품 보존 프로젝트' 국내 첫 지원 대상

(대구=연합뉴스) 황희경 기자 = 조선을 대표하는 화가 겸재 정선(1676∼1759)은 진경산수화의 대가로 유명하지만, 화훼영모화(꽃과 풀, 날짐승과 길짐승 등 동물을 소재로 한 그림)에서도 탁월한 실력을 발휘했다. 관찰을 통해 대상의 고유한 특징을 사실적으로 표현했다는 점에서 '진경화조'라 불릴 만한 양식을 창출했다.
그 중 대표적인 작품이 8폭으로 된 '화훼영모화첩'이다. 패랭이꽃, 갈대꽃 위에 날아드는 호랑나비와 갈대꽃을 갉아먹는 풀무치를 그린 '석죽호접', 한여름 외밭 속 참개구리를 그린 '과전전계', 들쥐 한 쌍이 수박을 훔쳐먹는 장면을 담은 '서과투서', 가지밭의 두꺼비를 표현한 '하마가자'가 담겼다. 여뀌꽃과 매미를 묘사한 '홍료추선', 맨드라미꽃과 어미닭, 늦병아리 3마리를 그린 '계관만추', 벌레를 쫓는 듯한 장닭의 모습을 담은 '등롱웅계', 방아깨비를 주시하는 검은 고양이를 그린 '추일한묘'도 함께 구성된 화첩으로 정선의 말년 작품으로 추정된다.

꽃과 풀벌레, 동물과 곤충을 섬세한 필치로 묘사했고 화려한 색채와 감각적인 구도가 돋보이는 이 작품이 2년간의 수리·복원을 마치고 대구간송미술관의 '화조미감'전을 통해 처음으로 일반에 공개됐다.
10일 대구간송미술관에 따르면 간송미술관 유물관리팀과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이상현 교수가 진행한 수리·복원 작업을 통해 '화훼영모화첩'에 대한 새로운 사실이 여럿 밝혀졌다.
비단에 그려진 이 그림들은 그동안 장황(표구) 없이 8장 낱장으로 보관돼 있었다. 미술관 측은 두루마리나 족자처럼 말아서 보관할 때 생기는 손상 유형이 없었던 점, 각 그림의 크기가 가로 20.8cm, 세로 30.5cm로 크지 않았던 점 등을 고려해 이 그림들이 원래 병풍이나 화첩의 형태일 것으로 추정했다. 최종적으로는 각 그림에서 비슷한 형태로 벌레먹음(충해)이 나타났다는 점에서 폭마다 각각 다른 형태로 충해가 나타나는 병풍보다는 화첩이었을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수리·복원팀은 또 그림들의 충해가 두 장씩 데칼코마니 형태로 닮은 꼴이라는 점을 확인하고 낱장으로 보관됐던 그림들이 사실은 호랑나비와 매미, 두꺼비와 개구리, 고양이와 쥐, 암탉과 수탉 등 서로 연관된 소재들이 짝을 이뤄 화첩의 좌우에 배치됐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작품에 사용된 안료와 기법도 과학적으로 분석됐다. A4 용지 정도의 작은 크기 그림들이지만 석록(말라카이트), 석청, 진사, 금 등 고급 안료가 다양하게 사용됐다. 또 같은 금을 사용했더라도 참개구리 등 부분의 노란색은 밑바탕에 연백(납을 부식시켜 만든 가공 안료)을 칠하고 그 위에 금을 칠했다면, 두꺼비 배 부분의 노란색은 석황을 이용한 가공안료에 금을 더하는 식으로 섬세하게 색을 표현했다는 점도 확인했다. 이를 두고 미술관 측은 "화려함과 섬세함을 특징으로 하는 정선의 화풍과 만년기의 탁월한 기량을 엿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 같은 수리·복원 작업은 미국 금융사인 뱅크오브아메리카(BoA)의 후원 덕분에 이뤄질 수 있었다.
2010년부터 세계 유수의 박물관과 미술관이 소장한 주요 작품들의 수리·복원을 후원하는 '예술작품 보존 프로젝트'(Art Conservation Project)를 진행하는 BoA는 지난 2019년 간송미술관에 이 프로젝트에 참여할 의사가 있는지를 타진했다. 이에 미술관 측은 정선의 '화훼영모화첩'을 복원하고 싶다고 신청했고 프로젝트에 최종 선정돼 총 6천800만원을 지원받았다. 루브르박물관의 '사모트라케의 니케', 보스턴미술관 소장품인 빈센트 반 고흐의 '농부가 일하는 들녘' 등 역사적 가치가 있는 작품을 대상으로 하는 이 프로젝트에 국내 작품이 선정된 것은 '화훼영모화첩'이 처음이라고 미술관 측은 설명했다.
복원을 마치고 공개된 '화훼영모화첩'은 8월 3일까지 '화조미감'전에서 볼 수 있다. 조선 시대 화조화를 모은 이번 전시에서는 보물로 지정된 단원 김홍도의 '병진년화첩', 대중적으로도 널리 알려진 신사임당의 '초충도' 병풍, 조선 중기의 대표적 화가인 이징(1581∼?)의 세련된 궁정 취향 수묵화조도인 '산수화조도첩' 등 16세기부터 19세기까지 조선 시기별 미감을 담은 화조화 37건 77점을 소개한다. 유료 관람.
zitrone@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