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편집자 주 = 한국국제교류재단(KF)의 지난해 발표에 따르면 세계 한류팬은 약 2억2천5백만명에 육박한다고 합니다. 또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초월해 지구 반대편과 동시에 소통하는 '디지털 실크로드' 시대도 열리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한류 4.0'의 시대입니다. 연합뉴스 동포·다문화부 K컬처팀은 독자 여러분께 새로운 시선의 한국 문화와 K컬처를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되고자 전문가 칼럼 시리즈를 준비했습니다. 시리즈는 매주 게재하며 영문 한류 뉴스 사이트 K바이브에서도 영문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건축가 김수근(1931~1986) 선생은 내게는 큰 산이다. 그는 나의 스승이며 국회의사당을 설계한 건축가로 잘 알려진 분이다.
내가 김수근 선생과 함께 일한 것이 1965년 봄부터 71년 봄까지니까 만 6년이 더 됐다. 선생의 곁을 떠난 후 책을 읽으면서 몇 달을 정릉 집에 틀어박혀 지냈다.

1977년에 당시 김수근 건축연구소 윤승중(그도 나처럼 훗날 김수근문화재단 이사장을 역임한 선배다) 기획실장의 대학 동기인 박상돈 선배가 경기고등학교의 영동 이전 신교사 설계를 함께하게 됐다. 어쩌다가 나도 거기 불려 가 함께 일하게 됐다.
그때 말로 함께 일한다는 뜻은 다른 사람들 대부분이 그랬듯이 여관방을 하나 얻어서 각자 제도판과 T자, 삼각자 등을 싸 들고 모여 합숙을 시작하는 것이다. 밤과 낮이 따로 없고 작업실, 침실이 따로 없이 온돌 방바닥에 앉아 무릎에 제도판을 펴고 도면을 그리는 삶이다.
그리던 도면을 밥상에 얹어놓기도 하고 졸리면 그대로 누워서 잠을 자고 밥이 들어오면 일어나 앉아 먹고 그런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일이 끝나면 성과품을 납품하고 설계비를 받아 배분하고 헤어진다.
그 일은 문교부와 교육위원회를 출입하면서 학교시설을 몇 개 설계한 박 선배가 수주해왔다. 처음 계획과 달리 민관식 당시 문교부 장관의 고교평준화 발표로 인해 경기고등학교도 일반 학교처럼 학생 수대로 교실, 교무실, 화장실만 지어주는 예산이 나오는 상태가 됐다. 강당, 체육관, 과학관. 미술관, 음악당, 도서관 등은 예산이 없다는 것이어서 그 부족분을 동창회가 갹출하기로 했던 모양이었다.
그러다 보니 문교부 예산보다 동창회 모금의 포션이 더 커지게 됐고 동창회가 자연스럽게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서 급기야는 동창회가 설계자를 뽑아 주도적으로 일을 하자고까지 가게 됐고 그쪽에선 자연스럽게 "설계는 누가 뭐래도 김수근 동문이지"라는 의견이 분분해졌다.
그때 나는 스물아홉 살 나이에 내 모교를 설계한다는 상황에 들떠서 매일 밤을 새우는 강행군을 하고 있었다. 과기처 시험에 합격해서 연말의 네덜란드 유학과 바우센트룸 장학금을 약속받은 상황이었기에 시간에도 쫓기고 있었다.
그런데 경기고등학교 동창회가 우리 일을 빼앗아 가려고 하고 있었다. 나는 선배들로부터 그 이야기를 듣고 무슨 깊은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김수근 선생을 찾아가 우리가 하는 일을 설명했다. 그리고 김 선생에게 내가 그 일을 꼭 하고 싶다고 했다.
"그래? 알았어" 하더니 동창회 사무실인지 어디로 전화를 걸어서 그 일은 김 모가 하는 게 좋겠다고 이야기하셨다.
"아마 미스터 김이 나보다는 훨씬 더 열심히 할 거요."
그렇게 해서 우리는 일을 계속했고 나는 그 일을 끝내고 로테르담으로 떠났다. 돌아와 보니 그 일은 원설계대로 되지 않았다. 하지만 어쩌다 보니 감사하다는 이야기를 제대로 할 겨를도 없었다.
1980년에 신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키고 처음으로 만든 것이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소위 국보위)라는 것이었는데 말하자면 혁명위원회였다.
이들은 정권의 정통성을 확보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민심 수습책이라는 것을 내놓아 선심 정책으로 민중의 지지를 얻어 보려 했다. 그 일환으로 기초질서 확립이니 뭐 그런 아이디어들을 내놓아 '깡패소탕'이라는 명목으로 삼청교육대를 만드는 등 지금 생각해 보면 말도 안 되는 짓을 하였다.
그중 가장 기막힌 것이 국보위 민원실이었다. 3개월 한시적으로 운영을 하면서 모든 민원(民怨) 즉, 서민이 억울한 일을 당했으면 모두 풀어주겠다며 선심을 베풀고 투서 형식으로 억울한 일을 적어내게 했다.
그러니 온갖 무고(誣告)가 난무하고 별 우스운 일이 다 일어났다. 야간에 급환으로 병원 문을 두드리다가 치료를 못 받은 사람이 민원실에 그 사연을 접수하면 당장 그 의사는 덕수궁에 주둔한 군부대에 끌려가서 얻어맞고 나오고 그 일은 기사화되기도 전에 검열에서 삭제되거나 악덕 의사로 둔갑해 발표되기도 했다.
나는 그런 일들이 나에게 올 일은 아니겠거니 여기고 있었는데 어느 날 나에게도 국보위에서 조사가 나왔다. 누군가가 투서를 하기를 김 모란 자가 건축사 면허도 없이 행세하고 다니니 혼내 주라는 내용이라는 거였다.
나에 관한 조사서류는 건설부를 거쳐 서울시를 거쳐 검찰에 넘겨졌고 검찰에서는 군에서 이첩된 사안이라 가볍게 처리할 수 없다며 '건축사법 4조 위반'으로 약식기소했다.
약식재판에서 50만원의 벌금형이 떨어졌다. 벌금을 내고 끝내는 일은 어렵지 않았으나 그때 내 판단으로는 그대로 승복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정식재판을 청구했고 젊디젊은 1심 판사는 나에게 '죄질이 나쁘고 뉘우치는 기색이 없고 판사를 가르치려 든다'는 이유로 6개월 징역형을 선고했다.
나는 또 어쩔 수 없이 항소했고 나이가 제법 든 2심 판사는 이 사건을 재미있게 생각했는지 자기가 이름을 알고 있는 건축가 두 사람 김중업, 김수근을 거명하며 이분들이 피고인을 위해 증언해 줄 수 있겠는가를 물었다.
"선생님 저의 재판에 좀 나와 주십시오."
나는 김 선생을 찾아가면서 수백 번 그 안 나오는 말 한마디를 연습했다. 김 선생은 내 이야기를 듣더니 즉석에서 "알았어, 그게 언제지?"라고 했다. 그렇게 해서 선생이 못난 제자를 둔 덕에 재판정에 출두하게 됐다.
우리는 정해진 시간에 갔지만 온갖 잡범들의 재판을 두세 시간 구경하며 차례를 기다려야 했다. 재판장이 물었다.
"증인이 유명한 건축가 김수근입니까"로부터 시작해 "사건 피고인이 무죄라고 생각하는가요"로 끝날 때까지 김 선생은 특유의 달변으로 제자를 변론했다.
그 결과로 나는 무죄 판결을 받았고 검찰이 상고한 대법원에서도 원심대로 무죄가 확정됐다.
40여년 전 이 이야기는 지금 생각해 보면 마치 꾸며낸 이야기처럼 극적이고 재미가 있다. 김 선생은 내가 76년 사간동에 사무실을 열었을 때도 특별히 모신 적이 없었는데 혼자 찾아와서 잘해 보라고 격려하고 가신 적이 있다.
나는 그때를 돌이켜보면서 내가 후배나 제자에게 그렇게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곤 한다. (계속)
김원 건축환경연구소 광장 대표
▲ 독립기념관·코엑스·태백산맥기념관·국립국악당·통일연수원·남양주종합촬영소 등 설계. ▲ 문화재청 문화재위원, 삼성문화재단 이사, 서울환경영화제 조직위원장 등 역임. ▲ 한국인권재단 후원회장 역임. ▲ 서울생태문화포럼 공동대표.
* 더 자세한 내용은 김원 건축가의 저서 '행복을 그리는 건축가', '꿈을 그리는 건축가', '못다 그린 건축가'를 통해 보실 수 있습니다.
<정리 : 이세영 기자>
seva@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