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오페라단 '세 개의 오렌지에 대한 사랑', 예술의전당서 국내 초연
기발한 이중의 패러디 돋보인 연출…29일까지 공연
기발한 이중의 패러디 돋보인 연출…29일까지 공연

(서울=연합뉴스) 이용숙 객원기자 = 비극, 희극, 서정극을 보고 싶다고 외치는 다양한 무리의 '가짜' 관객들(실제로는 합창단과 연기자들)이 객석에서 벌떡 일어서거나 객석 통로를 달려 무대로 올라간다. 이들은 극의 진행에 끊임없이 개입한다. 이처럼 무대와 객석의 경계가 사라진 유쾌한 희극에 관객들은 마음껏 웃었다. 지난 26일 저녁 국립오페라단(단장 겸 예술감독 최상호)이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무대에 올린 러시아 작곡가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의 오페라 '세 개의 오렌지에 대한 사랑'(1921) 국내 초연에서다. 로렌초 피오로니의 기발한 아이디어와 치밀하게 계산된 연출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는 관객들은 파울 촐러가 디자인한 쉴 새 없이 바뀌는 무대에서 눈을 떼지 못했고, 휴식 시간에는 "이렇게 재미있는 현대오페라는 처음"이라며 놀라움을 표했다.

웃지 못하는 병에 걸린 왕자가 여자 마법사 파타 모르가나를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가 그 벌로 세 개의 오렌지를 향한 사랑에 빠지는 저주를 받는다. 본 적도 없는 오렌지들을 갑자기 미친 듯이 사랑하게 된 왕자는 말리는 왕을 뿌리치고 광대 트루팔디노와 함께 길을 떠난다. 악마 파르파렐로의 차를 타고 달리는 왕자와 광대의 여정은 무대 전면에 펼쳐지는 도로의 동영상으로 알아볼 수 있는데, 출발지는 현대백화점이 스쳐 지나가는 서울의 강남이고 오렌지를 찾으러 도착한 곳은 산마르코 성당 앞 광장이 보이는 베네치아다. 연출가가 합성 영상으로 베네치아에서 놀고 있는 왕자와 광대를 보여주는 이유는 그곳 베네치아가 이탈리아어 원작 '세 개의 오렌지에 대한 사랑'을 쓴 18세기 작가 카를로 고치의 활동무대였기 때문이다. 연출가는 고치가 부흥시키려 했던 즉흥극 '코메디아 델라르테'의 가면을 극에 등장시키기도 했다.
오렌지를 찾으러 간 크레옹트의 성에서 왕자, 광대와 마주치는 거대하고 무시무시한 요리사는 이번 연출에서 무대에 등장하지 않고 목소리만 들려준다. 대신 엄청나게 큰 목각 손 두 개가 트루팔디노를 붙잡아 들어 올린다. 이 공포의 요리사가 트루팔디노의 예쁜 실크 리본에 넋을 잃는다는 설정 자체도 웃음을 유발하지만, 그러는 사이 왕자가 오렌지 세 개를 훔쳐내는 장면도 이전의 다른 프로덕션들에 비해 훨씬 긴장감 넘치게 연출됐다.

동화적이고 단순하게 보이는 스토리의 표면 아래를 파헤쳐 연출가는 그 다층적인 구조를 드러내며 이중의 패러디를 만들어냈다. 색감이 화려하고 형태가 과장된 의상은 오히려 왕, 왕자, 총리, 공주, 신하들의 우스꽝스러움과 무능함을 드러내는 도구로 작용한다. 주인공인 왕자는 얼핏 보면 모험과 고초를 겪으면서 깨닫고 성장해 마침내 영웅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주인공의 전형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큰 노력 없이도 마법사와 광대 등의 도움으로 아름다운 공주를 만나 결혼하는 주인공이다. 이런 스토리 자체가 '투란도트' 같은 전통적인 오페라의 영웅 서사를 패러디하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이 오페라에서는 오렌지 공주와 왕자가 만나 '영원한 사랑'의 고백을 폭포수처럼 쏟아내는 장면조차도 낭만적이기보다 희극적으로 보인다.

연출가는 이런 원작 오페라의 패러디 요소를 다시 한번 현대적으로 해석해 이중의 패러디를 완성했다. 오렌지에서 나온 완벽하게 아름다운 니네트 공주를 태엽으로 움직이고 말하는 '호프만 이야기'의 올랭피아 같은 로봇으로 설정한 것이다. 산산이 부서져 머리와 팔다리가 모두 분리된 공주를 필사적으로 조립해 상체만이라도 안고 춤추는 왕자는 인공지능(AI)의 환상에 빠진 존재처럼 보인다. 1막에서 무대가 위로 올라가며 핏빛이 서린 은색 지하 고문실이 나타나는 장면은 버르토크의 오페라 '푸른 수염의 성'을 떠올리게 했다. 원작에 들어있던 성차별적, 인종차별적 요소를 연출의 아이디어로 극복한 점도 높이 평가할 만하다. 대본 중 '잘난척하는 인간'을 뜻하는 '그랑드 테트'(큰 머리)에서 착안해 스메랄딘의 머리에 커다란 놀이공원 탈을 씌운 것도 대단히 효과가 뛰어난 착상이었다.
작년 국립오페라단의 '한여름밤의 꿈'을 지휘해 호평받은 지휘자 펠릭스 크리거는 음악의 코믹한 뉘앙스와 복잡한 리듬의 디테일을 충분히 살려가며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를 안정적으로 이끌었다. 15명에 달하는 솔로 성악가들은 저마다 개성이 다른 등장인물들의 특징을 탁월하게 표현했고, 왕자 역을 맡은 테너 김영우의 놀라운 기량이 특히 귀를 사로잡았다. 국립오페라단 노이오페라코러스는 신체 움직임이 무척 다채로웠던 이번 연출을 적극적으로 소화하며 음악이 제대로 들리게 하는 연기를 펼쳤다. 대본 언어는 프랑스어. 공연은 29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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