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형 노인일자리 한해 65만명 참여…"위험해도 이것 말고 일할 데 없어"
[※ 편집자 주 =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임에도 2023년 기준 한국 노인의 빈곤율은 38.2%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 회원국 중 가장 높았습니다. 65세 이상 연금 소득자의 월평균 연금 소득은 80만원 수준으로 1인 가구 월 최저 생계비 134만원(2024년 기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생활고에 시달리는 노인들이 월 30만원 안팎에도 공공 일터로 나설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노인의 경제 자립과 사회 참여를 지원하는 노인 일자리 사업은 핵심 복지정책 중 하나로 자리 잡았지만, 적지 않은 참여 노인들이 매년 일을 하다가 다치거나 숨지고 있습니다. 이에 연합뉴스는 공공형 노인 일자리 사업의 안전사고 현황과 문제점을 짚고 대안을 제시하는 기사를 3편에 걸쳐 싣습니다.]
(장수=연합뉴스) 나보배 기자 = "기냥(그냥) 라면이나 끓여서 막걸리 한잔씩들 했어. 이렇게 큰 사고가 났는데 입맛이 있겄어?"
지난 5일 오후 2시께, 전북 장수군 장계면의 풍저마을회관 처마 아래 그늘.
선처럼 나란히 앉아있던 8명의 노인 중 한 명이 살짝 취기가 오른 얼굴로 말했다.
이들 중 정모(70대)씨 등 4명은 이날 아침까지만 해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A씨(80대)와 함께 마을 앞 농수로에서 일했다. 노인 일자리사업에 참여한 것이다.
정씨가 사다리를 타고 농수로 아래로 내려가 물의 흐름을 방해하는 나뭇가지를 줍고 잘라 위쪽의 A씨에게 건네면 A씨가 이를 정리하는 작업이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A씨가 2ｍ 아래 농수로로 떨어졌고, 머리 등을 크게 다쳐 현장에서 숨졌다.
현장에 있던 노인들은 당시 A씨가 고무신을 신고 있었는데 보호난간 안쪽에서 작업을 하다가 발을 헛디뎌 떨어져 사고가 난 것으로 추정했다.
노인들의 짐작처럼 A씨가 서 있었을 것으로 예상되는 곳은 풀과 작은 나무들이 90도 경사의 농수로 상부를 뒤덮어 매우 위험해 보였다.
정씨는 "각자 일을 하느라 처음에는 사고가 난 줄도 몰랐다"며 "(A씨와는) 마을회관에서 항상 만나 밥도 먹고 얘기도 나누는 사이였는데, 마을에 빈집이 하나 더 는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아프다"고 허망해했다.
허공을 응시하는 정씨 이마의 주름 골이 깊어졌다. 그의 말을 가만히 듣던 서모(70대)씨도 "(A씨는) 말이 많아서 앵무새 같던 사람"이라며 고인을 떠올렸다.
그러면서 "농수로에 나뭇가지가 널브러져 있으니 보기에 좋지도 않고 장마가 오면 나뭇가지가 더 쌓여 물난리가 날 것 같아서 깨끗하게 치워보려고 했던 것"이라며 "그런데 사고가 나버렸다"고 말을 보탰다.
이 사고보다 사흘 앞선 지난 2일에도 노인 일자리사업체 참여한 노인이 사망했다.
고창군 고창읍의 한 자동차공업사 주변에서 잡초 제거작업을 하던 80대 B씨가 공업사로 진입하던 28t 탱크로리 차량에 깔려 숨지는 사고가 났다.
경찰은 우회전하던 탱크로리 운전자가 미처 B씨를 보지 못해 사고를 낸 것으로 보고 있다.
노인 일자리는 크게 공공형과 사회서비스형, 민간형 등 세 유형으로 나뉜다. 잡초를 뽑거나 마을 도로를 정비하는 사업은 모두 공공형에 속한다.
공공형 일자리 참여 노인들은 하루 3시간, 한 달 최대 10일을 일하며 29만원을 번다.
일자리보다는 용돈에 가까운데, 이렇게 일하는 노인이 2024년 기준 전북에서만 5만9천554명, 전국적으로 65만9천81명에 달한다.
사회서비스형(14만7천69명)이나 민간형(5만3천739명)보다 자격 조건이 까다롭지 않다 보니 3.2배나 많은 노인이 공공형으로 일을 하고 있다.
문제는 공공형 일자리 대부분이 단순 육체노동 중심이어서 작업 중 넘어지거나 찰과상, 골절 등을 입는 노인들이 속출하는 데 있다.
한국노인인력개발원에 따르면 지난해에는 3천457명이, 2023년에는 3천326명, 2022년에는 2천956명이 공공형 노인 일자리에 참여했다가 부상을 입었다.
사망자 역시 2021명 23명, 2022명 23명, 2023년 29명, 2024년 22명 등으로 해마다 20명 이상씩 꾸준히 발생하고 있다.
5년간 공공형 노인 일자리에 참여했다는 이모(70대)씨는 "30만원이 어떤 사람들한테는 적을지 몰라도 일할 곳이 없는 노인들한테는 한 달을 생활할 수 있을 만큼 큰돈"이라고 말했다.
이어 "조금씩 모아서 손주들한테 용돈도 주고 있는데, 이런 사고가 났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이 일을 계속 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말끝을 흐렸다.
그러면서도 "그래도 의자처럼 가만히 있기보다는 동네 돌아다니면서 청소도 하고, 사람들 얼굴도 보고 말도 하면 시간도 빨리 가고 좋다. 이거(노인 일자리) 아니면 우리 노인들은 일할 데도 없다"도 토로했다.
이어 "사고가 자주 난다고 해서 일을 안 할 수도 없고, 일할 때 쓰라고 (미끄러지지 않는) 신발도 주고 움직이기 편한 작업복도 주고 하면 좋을 텐데 국가가 그럴 돈이 어디 있겠나 하는 생각도 든다"고 체념했다.
warm@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