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쓸 수 없는 상실의 감각…폴 오스터 유작 '바움가트너'
연합뉴스
입력 2025-04-25 17:42:25 수정 2025-04-25 17:42:25
사랑하는 사람 떠나보낸 아픔과 남겨진 삶의 의미 다룬 장편소설


'바움가트너' 표지 이미지[열린책들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연합뉴스) 황재하 기자 = "그는 이제 인간 그루터기, 자신을 온전하게 만들어주었던 반쪽을 잃어버리고 반쪽만 남은 사람인데, 그래, 사라진 팔다리는 아직 그대로이고, 아직 아프다. 너무 아파서 가끔 몸에 당장이라도 불이 붙어 그 자리에서 그를 완전히 태워 버릴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노교수 '사이 바움가트너'는 집에 오기로 한 가사도우미의 어린 딸에게서 전화를 받는다. 아이의 아버지이자 가사도우미의 남편이 일터에서 손가락이 잘려 나가는 사고가 벌어졌다는 소식이다.

다행히 손가락은 곧바로 꿰매 붙여졌지만, 이 일로 바움가트너는 영구적으로 팔이나 다리가 절단된 사람이 사라진 팔다리에 '환지통'이라는 통증을 느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바움가트너는 환지통에 대해 호기심이 생겨 의학 문헌을 읽기 시작한다. 환지통이 마치 10년 전 아내를 잃은 자신의 아픔에 대한 은유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폴 오스터[EPA=연합뉴스 자료사진. 재판매 및 DB 금지]

작년 4월 유명을 달리한 미국의 베스트셀러 작가 폴 오스터(1947∼2024)의 유작인 장편소설 '바움가트너'가 국내 번역 출간됐다.

은퇴를 앞둔 독신의 교수 바움가트너가 주인공인 이 소설은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아픔과 그럼에도 끝나지 않고 이어지는 삶의 의미를 들여다본다.

이미 잘린 팔과 다리에서 환지통을 느끼듯 바움가트너는 아내 애나를 잃은 뒤 손쓸 수 없는 아픔에 속수무책이다. 아내가 입던 옷을 꺼내 곱게 개서 상자에 넣어놓는 일을 반복하고, 번역가였던 아내가 쓰던 작업 공간을 그대로 유지한다.

폴 오스터 특유의 감각적인 이미지가 꼬리에 꼬리를 무는 구성은 인물이 겪는 아픔을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독자가 이야기에 깊이 빠져들게 한다.

예를 들어 책의 도입부에서 바움가트너는 엉망진창인 하루를 보내는데, 우연히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이 아내를 향한 그리움으로 매끄럽게 이어진다.

바움가트너는 깜박하고 불 위에 올려둔 냄비를 치우다가 손에 화상을 입고, 가사도우미는 갑작스러운 사고 때문에 오지 못하게 되며, 갑자기 방문한 전기 검침원에게 계량기 위치를 알려주다가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 무릎을 다친다.

이 모든 사건을 겪은 바움가트너는 힘든 하루의 시작점인 냄비를 바라보는데, 가난한 학생이던 50년 전 바로 그 냄비를 사러 가게에 갔다가 아내를 처음 만난 것을 떠올린다.

다만 이 소설이 상실의 아픔만을 이야기한 것은 아니다. 아내의 죽음이라는 상실을 받아들인 바움가트너는 차츰 어떤 방식으로 자기 삶을 이어갈 수 있는지 생각한다.

바움가트너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청혼하면서 하는 말은 이 같은 작품의 메시지를 드러낸다.

"다른 사람들과 연결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삶이 없는 것과 같죠. 운이 좋아 다른 사람과 깊이 연결되면, 그 다른 사람이 자신만큼 중요해질 정도로 가까워지면, 삶은 단지 가능해질 뿐 아니라 좋은 것이 돼요."

폴 오스터는 '빵 굽는 타자기', '폐허의 도시', '달의 궁전', '뉴욕 3부작' 등 소설은 물론 시, 에세이. 번역, 평론, 시나리오 등 여러 분야에서 활약하며 미국 현대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명으로 꼽힌다. 펜/포크너상, 메디치상 외국문학 부문 등을 받았다.

열린책들. 정영목 옮김. 256쪽.

jaeh@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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