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집자 주 = 한국국제교류재단(KF)의 2024년 발표에 따르면 세계 한류 팬은 약 2억2천5백만명에 육박한다고 합니다. 또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초월해 지구 반대편과 동시에 소통하는 '디지털 실크로드' 시대도 열리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한류 4.0'의 시대입니다. 연합뉴스 동포다문화부 K컬처팀은 독자 여러분께 새로운 시선의 한국 문화와 K컬처를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되고자 전문가 칼럼 시리즈를 준비했습니다. 시리즈는 매주 게재하며 영문 한류 뉴스 사이트 K 바이브에서도 영문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인공지능 기술의 발달로 회화, 조각, 클래식 음악 등 고전 예술은 물론 영화나 미디어 아트 등 현대 예술까지 급격히 발전하면서 변화하는 시대다.
이러한 발달은 예술의 창작과 소비 방식에도 전방위적인 변화를 일으켰다. 예술 분야에서 인공지능의 영향은 주로 예술 작품을 만드는 방식에 집중됐다. 이제 인공지능은 예술가의 창작 도구로 자리 잡아, 과거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수준의 작품을 만들어낸다. 단순한 보조 기능이 아니다.
'노동의 성실함'이 상당히 투입돼야 생산할 수 있는 예술 작품을 인공지능이 척척 만들어낸다. 상당 부분 단순노동일 수 있는 작업뿐 아니라 창의적 '고뇌'의 시간이 필요한 결과물도 나온다.
특히 회화, 음악, 영화, 디자인 등의 결과물은 기존 예술과 비교해서도 다양한 접근이 가능하다. 어떨 때는 인간의 창의성을 능가하는 예술적 결과물이 나온다.
많은 예술가는 기술의 발달이 예술의 본질을 해치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우려도 했다. 필자의 견해는 조금 다르다. 이전 칼럼에도 언급한 대로 기술 발전은 단순히 예술을 위협하는 것만은 아니다. 고전 예술은 여전히 그 존재감을 이어가고 있으며, 나름의 방식으로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
클래식 음악도 디지털 시대의 변화 속에서 여전히 중요한 예술 형태로 남아 있다. 디지털 음원이나 스트리밍 서비스가 등장한 뒤, CD나 테이프와 같은 물리적 형태로 존재하는 음반은 대부분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도 여전히 클래식 음악은 아날로그적 소비 방식을 고수하는 팬이 많다. 이들 대부분은 클래식 음악을 유튜브로 듣거나 MP3로 듣는 것을 기피한다. 무압축 음원이나 CD를 진공관 앰프 등 수십여년 전 '향유' 방식을 고수하는 팬이 많다. 테이프도 크롬(chrome) 테이프라는 특별한 방식으로 만들어진 테이프를 선호했고 실제로 '성음'이라는 클래식 레이블은 크롬 테이프만 고수했다.
이들은 LP나 카세트 테이프를 수집하거나, 공연장에서 라이브 연주를 즐기는 등 전통적 방식으로 클래식 음악을 향유한다.
단순히 음악을 듣는 것 이상의 경험을 체득하며, 음악 자체에 대한 애착과 감상을 더욱 깊이 있게 만들어준다.
필자도 샌프란시스코에서 클래식 콘서트에 방문했다. 물론 한국에서도 콘서트를 자주 방문하는 편이었다. 호기심이 발동해 샌프란시스코에서 주기적으로 낮에 열리는 클래식 콘서트에 얼마나 많은 관객이 오는지 보고 싶었다.
콘서트에는 연주를 듣기 위해 많은 관객이 찾아왔고, 공연 시작도 전에 만석으로 자리가 모자라 뒤에 꽤 많은 사람이 서서 연주를 듣고 있었다.
비슷한 맥락에서, 영화도 디지털 기술을 만나 급격히 진화했다. 제작에 있어 디지털 촬영 기법, CGI 기술과 배급에 있어 스트리밍 서비스로의 변화는 영화 산업에 큰 영향을 미쳤다. 생산과 소비 방식 자체가 모두 바뀐 것이다.
영화 산업 역시 이러한 변화가 모두 부정적인 결과만을 가져온 것은 아니다. 오히려 디지털 기술 덕분에 영화는 더욱 다양한 장르와 스타일을 시도할 기회를 얻었다.
그렇게 해서 대중에게 새로운 경험을 제공하고 있다. 인공지능이 직접 제작한 영화나 짧은 영상이 등장해 영화의 형태와 내용이 변화하고 있다.
즉, 새로운 창작 방식과 소비 방식이 계속 나오고 있다. 인공지능은 단순히 기존의 영화 제작 방식에 보조 역할을 하는 것을 넘어서 스토리텔링 방식까지 변화시키고 있다. 인공지능이 자동으로 스토리라인을 작성하거나, 등장인물의 대사를 생성하는 방식은 과거의 전통적인 영화 제작 과정과는 다른 접근이다.
필자도 인공지능 영화를 제작하며 기존 영화와는 다른, 새로운 스토리텔링을 개발하는 것에 매진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도 구시대 기술이나 매체는 여전히 예술적인 가치로 평가받기도 한다. 테이프와 테이프 레코더는 앞서 언급한 대로 과거에 음악을 듣는 주요 방식으로 사용됐지만, 현재는 예술적 매체로 예술가에게 필요한 매체가 됐다.
테이프가 가진 고유의 특성과 한계 때문인데, 테이프에는 디지털 매체에서 발견할 수 없는 아날로그적인 따뜻함이 있다. 특유의 소리나 질감은 현대의 디지털 사운드와는 또 다른 예술적 경험을 제공한다.
이러한 이유로 일부 예술가는 테이프 레코더를 활용한 작품을 만들기도 하고, 과거의 감성을 현대적인 맥락에서 재해석하려고 시도한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원초적 비디오 본색' 트레일러
얼마 전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시네마테크에서는 '원초적 비디오 본색'이라는 기획전이 열렸다. 필자도 아날로그에 관심이 많아 다녀왔다. 놀랍게도 이 전시는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의 전환 과정에서 사라져간 비디오테이프(VHS)의 문화를 조명한 전시였다.
우리나라 영화산업에서 2차 저작권 시장인 비디오 테이프 유통 시장은 간과할 수 없는 요소다. 요즘처럼 K-컬처가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때에는 특히 더 그렇다.
VHS가 대중적으로 보급되던 시기에 비디오 유통 산업의 성장은 영화 전문 저널리즘과 블록버스터 제작, 영화의 학문적 연구 등과 맞물려 있었다. 필자 역시 '비디오 키즈'라 불리던 세대라 인공지능이 활황 하는 시대에도 2∼3년 전 열린 이 전시가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 자세히 소개한다.
이 전시는 비디오 매체의 역사 속에서도 더 이상 쉽게 접할 수 없는 'VHS'에 초점을 맞췄다. 전시는 VHS를 통해 유통된 '영화'라는 콘텐츠에 주목했고, 대중이 이런 방식으로 콘텐츠를 소비하는 문화를 집중해서 조명했다.
전시에 소개한 VHS 테이프의 대부분은 광주 지역의 영화인 조대영 씨가 소장한 자료로, 2만 5천편의 영화가 공개됐다. VHS에 기록된 장르별, 지역별 분류뿐 아니라 비디오 케이스에 남아 있는 영화 홍보 문구, 관람 연령 표시, 비디오 대여점의 대여료와 대여 기간 등은 당시의 시대적 문화를 반영하는 요소로 특별히 눈길을 끌었다.
지금 시대는 디지털이 최우선인 것처럼 여기며 인공지능 시대에 콘텐츠의 본질을 간과할 수 있는 요소가 많다. 인공지능 기술과 문화의 융합은 단순히 신기술을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의 기술이 조화를 이루며 모든 세대가 시대적·기술적 한계를 뛰어넘는 과정에서 출발한다.
클래식 콘서트, CD, LP 음악과 VHS라는 매체가 오늘날 새로운 세대들에게는 낯설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의 창의력은 반드시 기술 기반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인공지능 기술이 발전해도 그 근간이 되는 콘텐츠의 핵심은 세대를 뛰어넘어 계속 전해질 것이다.
아직도 2천년 전 히포크라테스가 한 말 'Ars Longa, Vita Brevis'(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에서 수많은 예술가가 영감을 얻는다. 그가 말한 예술이 원래는 'Ars'(아르스)로 '기예'라는 뜻이며 예술만 강조하고 기술을 간과한 의미는 아닌 것을 주목해야 한다.
인공지능이 아르스의 영역에 들어선 것은 기막힌 우연이 아니고 어쩌면 필연일 것이다.
이은준 미디어아티스트·인공지능 전문가
▲ 경일대 사진영상학부 교수
<정리 : 이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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