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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말저런글] 양립가능한 모순의 낱말들?

연합뉴스입력
[국어학회 홈페이지 캡처] (연합뉴스 DB)
모순(矛盾. 창 모 방패 순). 어떤 사실의 앞뒤, 또는 두 사실이 이치상 어긋나서 서로 맞지 않음을 이릅니다. 중국 초나라 상인이 창과 방패를 팔면서 창은 어떤 방패로도 막지 못하는 창이라 하고 방패는 어떤 창으로도 뚫지 못하는 방패라 했답니다. 앞뒤가 안 맞는 말을 했다는 데서 이 낱말이 생겨났다고 사전은 전합니다. 논리학은 모순율을 주요 사유 법칙으로 다룹니다. 어떤 명제가 참이면 그 부정은 동시에 참일 수 없다는 원리입니다. 상인이 말하는 창이 있다면 방패는 있을 수 없습니다. 거꾸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배중률(排中律. 물리칠 배 가운데 중)도 핵심 법칙입니다. 하나의 명제는 참이건 거짓이건 둘 중 하나이지 중간이 없다는 원리입니다. [내 키는 170㎝]란 명제는 맞으면 참이고 틀리면 거짓일 뿐 어중간한 그 무엇일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말글의 세계는 어떨까요? 몇몇 단어는 이 형식논리의 절대원리를 비웃습니다. 하나의 낱말이 정반대 뜻으로 자유롭게 쓰입니다. 언중은 모순을 느끼지 않습니다. 맥락으로 이해합니다. 사전도 변한 말뜻을 올려둬 현실을 반영합니다.

'엉터리'가 있습니다. 대강의 윤곽이라는 의미의 이 말은 [일주일 만에 일이 엉터리가 잡혔다]처럼 사용될 수 있지만 많은 경우 "그 애는 엉터리야"처럼 쓰여 '터무니없는 언동이나 그런 언동을 하는 사람'을 표현합니다. 칠칠하다 또는 칠칠맞다도 비슷합니다. '성질이나 일 처리가 반듯하고 야무지다'라는 뜻이라 "칠칠맞지 못한 사람"처럼 쓰이지만 "그 아이는 왜 그리 칠칠맞냐" 하고 부정을 생략한 채 같은 뜻을 나타내곤 합니다. '칠칠맞냐'가 '칠칠맞지 못하냐'의 줄임말처럼 쓰인 셈입니다.

주책도 유사 계열입니다. [나이가 들면서 주책이 없어져 쉽게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고 할 땐 '일정하게 자리 잡힌 주장이나 판단력'을 말합니다. 하지만, [그 사람, 주책바가지네]라고만 하여 주책없는 사람임을 표현하거나 [주책 떨다]처럼 사용하여 '일정한 줏대가 없이 되는대로 하는 짓'이란 의미를 담아내기도 합니다. 밥맛도 있습니다. [그거 밥맛 없어요]와 [그거 밥맛이에요]는 같은 의미로 쓰입니다. [그 녀석 참 재수네 재수야]와 [그 녀석 참 재수 없네 없어] 도 같습니다. 모순율을 깨는 또 하나의 예입니다. (서울=연합뉴스, 고형규 기자, uni@yna.co.kr)

※ 이 글은 다음의 자료를 참고하여 작성했습니다.

1. 엄민용, 『건방진 우리말 달인』, 다산북스, 2008 (유통사:교보문고, 전자책)

2. 우리말 산책, 칠칠맞은 사람이 됩시다! (엄민용 기자, 건방진 우리말 달인 저자) 2008년5월16일 입력 - https://sports.khan.co.kr/article/200805161950456

3.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온라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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