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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VIBE] 전태수의 '웹 3.0' 이야기…'관계' 빠진 메타버스 플랫폼의 명암
연합뉴스입력


서로에게 '아우라'가 되는 관계 자체가 세계의 구조를 이룬다. 쉽게 닫히는 방이 아니라, 시간이 쌓일수록 신뢰와 기억이 축적되는 광장에 가까운 플랫폼이다.
인공지능(AI) 시대는 이 전환을 더욱 절실하게 만든다. AI는 개인을 더 정교하게 분해하고, 취향과 행동을 데이터로 표면화한다. 연결은 많아지지만, 관계는 얕아지고, 공동체는 해체된다. 추천 알고리즘은 비슷한 사람끼리만 이어 붙이고, 서로 다른 경험과 생각이 부딪칠 수 있는 '공동의 자리'는 점점 줄어든다.
이런 시대일수록 웹 3.0이 필요로 하는 것은 기술의 진보가 아니라 관계의 재설계다. 경쟁이 아니라 공명, 소비가 아니라 공동 창작, '나'가 아니라 '우리'의 회복이다. 이 지점에서 한국은 분명한 강점을 가진다. 한국에는 이미 세계가 주목하는 강력한 자산이 있다. 바로 K-컬처다. 음악, 드라마, 영화, 웹툰, 게임, 팬덤에 이르기까지 K-컬처는 콘텐츠를 넘어 의미를 공유하고 함께 환호하는 관계의 문화를 만들어 왔다. 아이돌 팬덤이 보여주는 집단 응원·기부·해시태그 행동, 드라마와 예능을 함께 보며 실시간으로 감정을 나누는 시청 문화, 웹툰·웹소설 기반 2차 창작 생태계까지, 한국의 콘텐츠 소비 방식은 본질적으로 '함께 보기'와 '함께 만들기'에 가깝다. 이는 공간보다 관계를 중시하는 차세대 메타버스와 가장 잘 맞는 조건이다. K-컬처의 팬덤은 개인을 고립시키기보다, 공동의 감정과 참여를 통해 '우리'라는 감각을 확장해 왔다. 콘서트장·팬 미팅·온라인 라이브는 물리적·디지털 공간을 넘나들며 '같은 순간에 같은 무언가를 향해 몰입하는 경험'을 제공한다. 웹 3.0이 꿈꾸는 '참여와 공동 소유'는 사실 이미 여기서 부분적으로 실험되고 있다. 누가 먼저 '밈'을 만들었고, 누가 팬아트를 그렸고, 누가 번역을 올렸는지가 커뮤니티 안에서 중요한 자산이 되는 구조가 필요하다. 이것을 기술적으로 더 정교하게 기록하고, 공정하게 보상하고, 장기적으로 축적하면 관계 중심 메타버스의 토대가 된다. 그래서 필자는, 웹 3.0 이후의 세계를 설계하는 데 있어 한국이 매우 유리한 출발선에 서 있다고 본다. 세계는 이미 한국이 의미를 만들고, 그 의미를 함께 소비하며 확장하는 방식을 경험했다. 이제 남은 것은 그 경험을 기술 위에, 그리고 웹 3.0의 구조 위에 올려놓는 일이다. 관계 중심 메타버스가 지향해야 할 몇 가지 축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참여의 단위를 '클릭'이 아니라 관계로 전환하는 것이다. 지금의 플랫폼은 조회수·좋아요·댓글 개수로 참여를 측정한다. 그러나 관계 중심 메타버스에서는 '얼마나 많이 눌렀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오래 함께했는가, 어떤 책임을 나눴는가'가 중요해진다. 예를 들어, 특정 프로젝트나 팬덤 커뮤니티 안에서 일정 기간 이상 기여한 사람에게는 보상 토큰을 넘어 의사결정 권한, 큐레이션 권한, 신규 참여자를 맞이하는 멘토 역할이 부여되는 식이다. 둘째, 콘텐츠의 소비가 아니라 공동 창작을 중심에 놓는 것이다. 지금의 메타버스는 거대한 쇼핑몰과 비슷하다. 다양한 경험을 '이용'하러 들어가지만, 구조는 대부분 소비 지향적이다. 관계 중심 메타버스는 반대로 '함께 만들기 쉬운 구조'를 먼저 설계해야 한다. 스토리·캐릭터·세계관을 사용자에게 일정 부분 개방하고, 그 위에 2차 창작·협업·로컬 버전을 쌓아 올릴 수 있도록 한다. K-팝의 응원법, 댄스 챌린지, 팬 메이드 콘텐츠가 보여주듯, 한국식 참여 문화는 이 방향과 자연스럽게 맞닿아 있다. 셋째, 소유권보다 '함께 돌봄'의 개념을 도입하는 것이다. 웹 3.0은 흔히 토큰과 NFT를 통해 '조각 소유'를 가능하게 한다고 말해왔다. 그러나 단순 소유 권한만으로는 공동체가 유지되지 않는다. 관계 중심 메타버스에서는 '이 공간과 프로젝트를 누가 얼마나 잘 돌보고 있는가'가 중요한 기준이 된다. 예를 들어, 어떤 가상 공간의 토큰을 많이 가진 사람이라도 커뮤니티에 해를 끼치면 경고받고, 반대로 토큰 보유량이 적어도 장기간 커뮤니티를 지켜 온 사람에게는 신뢰 지표가 올라가는 식이다. 넷째, AI를 '개인 최적화 장치'가 아니라 '관계 촉진 도구'로 쓰는 것이다. AI가 지금처럼 개인 취향을 미세하게 파고들기만 하면, 많은 사람은 점점 더 좁은 취향의 방에 갇히게 된다. 관계 중심 메타버스에서는 AI가 '함께할 만한 사람', '함께 만들 만한 프로젝트'를 추천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나와 비슷한 사람만이 아니라, 나와 다르지만, 좋은 긴장을 만들어 줄 수 있는 사람, 내 관심사와 맞닿은 다른 문화권의 사용자와 연결해 주는 역할이다. 이런 방향에서 보면, 웹 3.0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탈중앙화 기술, 블록체인, 토큰 경제는 도구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이 도구를 어떤 관계의 방식으로 엮어낼 것인가다. 메타버스가 증명한 것은 '기술적으로 공간을 확장하는 일'이고, 앞으로 우리가 증명해야 할 것은 그 공간에서 어떻게 '우리'를 회복할 것인가다. 관계 중심 메타버스는 아직 이름도, 구체적인 형태도 완성되지 않았다. 분명한 것은, 다음 세대의 디지털 세계는 더 이상 '나의 세계를 꾸미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점이다. 서로에게 아우라가 되는 관계, 함께 시간을 쌓고 책임을 나누는 연결, 삶의 맥락이 이어지는 디지털 공동체. 이것이야말로 웹 3.0이 처음 약속했던 '새로운 인터넷'의 실제 모습에 가까울 것이다. 또한 그 실험을 시작하기에, K-컬처와 팬덤, 집단적 감정의 문화를 이미 체화한 한국만큼 적합한 무대도 드물다. 메타버스가 '나'의 세계를 열어 주었다면, 이제 필요한 것은 '우리'의 세계를 설계하는 일이다. 관계를 중심에 둔 새로운 디지털 지평, 그것이 필자가 꿈꾸는 웹 3.0 이후의 방향이다.전태수 웹 3.0·블록체인 전문가
▲ 사단법인 환경과미래연구소 이사장. ▲ 한국인터넷미디어윤리위원회 이사장. ▲ 세계스타트업포럼 대표.
<정리 : 이세영 기자>
sev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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