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시선] 중일 갈등 외면하는 美트럼프…섭섭한 日


중국 함재기의 자위대 전투기에 대한 레이더 조사(照射·겨냥해서 비춤) 사건으로 중일 갈등이 한층 더 악화한 가운데 지난 8일 열린 집권 자민당 회의에 참석한 오노데라 이쓰노리 안보조사회장은 취재진에 "미국이 아직 명확한 발언을 내놓지 않았다"며 "동맹국이므로 미국도 공통의 인식에서 중국 측에 외교상 강한 메시지를 내주기를 바란다"고 대놓고 말했다.
다카이치 총리의 지난달 7일 대만 유사시 관련 발언 이후 중국이 일본 여행 자제령, 일본 수산물 수입 금지 재개 등 보복 조치를 잇따라 취하는 가운데서도 한 달여간 잠자코 있는 미국에 불만을 터뜨린 것으로 보인다.

다행히 곧이어 미 정부에서 이런 불만을 달래는 듯한 메시지가 나왔다.
미 국무부 대변인은 9일(현지시간) "중국의 행동들은 지역 평화와 안정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비판하고 "미일 동맹은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하고 단합돼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미국 B-52 전략 폭격기 2대와 일본 항공자위대 전투기 6대가 10일 동해 공역에서 합동 전술훈련을 벌였다. 중국과 러시아 군용기가 9일 동해와 오키나와현 해역에서 벌인 합동 훈련에 대한 견제 성격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특히 B-52는 주일 미군 기지에 배치돼있지 않은 기종인 만큼 최소한 주일 미군 차원 이상의 결정에 의해 투입된 셈이다.
그러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나 피트 헤그세스 국방부(전쟁부) 장관, 마코 루비오 국무장관 등 미국 외교·안보 라인 고위 인사들의 뚜렷한 대중국 우려 표명이나 비판은 여전히 나오지 않고 있다.
헤그세스 장관이 고이즈미 신지로 일본 방위상과 전화 통화한 후 미 국방부가 11일 낸 보도자료는 두 장관이 "방위지출 증액과 역량 강화를 위한 일본의 노력, 중국의 군사 활동들, 서남도서를 포함한 일본 전역에서의 실질적 훈련의 중요성에 대해 논의했다"며 "미일 동맹의 중요성을 재확인하고, 아시아·태평양에서의 침략을 억제하겠다는 그들의 의지를 강조했다"고 전했다.
그러나 '중국의 군사활동들'이라는 포괄적인 표현을 썼을 뿐 '레이더 조사', '중러 폭격기 일본 주변 공동 비행' 등 구체적 사례를 직접 거명하지도 않았고, 그런 활동에 대한 명확한 우려 표명도 자료에 담지 않았다.

사실 이런 흐름은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달 24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연락한 뒤 이튿날 이뤄진 다카이치 총리와의 통화 내용을 둘러싸고도 감지됐다.
다카이치 총리는 당시 통화 후 취재진에 "트럼프 대통령으로부터 어젯밤 이뤄진 미중 정상 간 통화를 포함해 최근 미중 관계 상황에 관한 설명이 있었다"고 전했으나 중일 갈등을 놓고 트럼프 대통령과 논의했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히 밝히지 않았다.
그러나 중국 관영매체인 신화통신은 트럼프 대통령이 시 주석과 통화에서 "중국은 제2차 세계대전 승리를 위해 중요한 역할을 했고, 미국은 중국에 있어 대만 문제의 중요성을 이해한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시 주석과 통화 내용을 소개한 소셜미디어(SNS) 글에서 대만 문제나 중일 갈등에 대해 거론하지 않았다.
이와 관련해 미 월스트리트저널(WSJ)은 같은 달 26일 트럼프 대통령이 다카이치 총리와 전화 통화에서 대만 관련 발언의 성량을 낮출 필요가 있다고 언급했다고 보도했다. 중국과 갈등을 빚는 다카이치 총리에게 '대만 문제로 중국을 자극하지 말라'는 식의 조언을 했다는 얘기가 된다.
트럼프 대통령이 중국의 희토류 수출 규제 연기, 미국산 대두 수입 재개 등 실리를 챙기면서 당분간 중국과의 직접적인 마찰을 피하려 한다는 관측도 나온다.
이번 중일 갈등의 단초가 된 다카이치 총리의 발언을 곱씹어보면 일본의 현 정부는 섭섭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지난달 7일 다카이치 총리의 발언은 중국이 대만을 해상봉쇄하면 존립위기 사태가 되느냐는 야당 의원의 질문에 답하는 과정에서 나왔다.
당시 다카이치 총리는 "해상 봉쇄를 풀기 위해 미군이 오면 이를 막기 위해 (중국이) 무언가 무력을 행사하는 사태도 가정할 수 있다"며 "전함을 사용해 무력행사를 수반한다면 존립위기 사태가 될 수 있는 경우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존립위기 사태는 일본이 집단적 자위권을 행사할 수 있는 상황을 뜻한다. 집단적 자위권은 자국이 공격받지 않더라도 동맹국 등 밀접한 관계의 나라가 공격받으면 공동으로 이에 대응할 수 있는 권리를 의미한다. 결국 대만 유사시 동맹국 미국이 중국의 무력 공격을 받게 되면 집단적 자위권을 행사하겠다는 얘기다.
전임 조 바이든 행정부가 동맹을 중시하는 외교 정책을 펼친 데 비해 트럼프 정부는 철저한 자국 이익 중심이라는 점은 새삼스럽지도 않다. 하지만 다카이치 총리는 어떻게든 좀 더 적극적인 미국의 지지를 받고 싶은 모양새다. 지난 10일 국회에서 야당 의원이 미일 정상회담 개최를 제안하자 "제가 워싱턴을 방문해도 좋고 트럼프 대통령의 해외 방문 때도 좋은 만큼 가능한 한 조기에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을 확실한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 한다면 미국에는 그만큼 매력적인 이익이 될 충분한 협상 지렛대 확보가 무엇보다 필요해 보인다. 중일 갈등을 둘러싼 향후 사태 전개는 역시 미국의 동맹국인 한국에도 눈여겨볼 대목이 적지 않을 것이다.
eva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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