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보그·거울 미로…인간과 기술 관계 탐구한 이불(종합)

(서울=연합뉴스) 박의래 기자 = 전시장에 들어서자 항공기 엔진 소음 같은 소리가 들렸다. 전시장 입구 공간에 매달린 17m에 달하는 은빛 비행선에서 나는 소리였다. 그리고 그 아래는 검은 갑옷을 입고 비행선을 타기 위해 기다리는 전사가 서 있다. 지금부터 시작하는 이불(61) 작가의 작품 세계로 함께 떠나는 동반자 같았다.
한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설치작가 이불(61)의 대규모 서베이 전시 '이불: 1998년 이후'가 오는 4일부터 서울 한남동 리움미술관에서 열린다. 서베이 전시는 작가의 활동을 총체적으로 되짚어보면서 그 세계를 탐구하는 방식이다.

전시는 1990년대 후반부터 현재까지 이어져 온 이불의 주요 작업을 종합적으로 조망하는 시간으로 조각, 대형 설치, 평면, 드로잉과 모형 등 150여 점이 공개됐다.
홍익대 미대를 나와 1987년 데뷔한 이불은 활동 초기 파격적인 퍼포먼스나 전시로 주목받았다. 나체로 천장에 거꾸로 매달리는 '낙태' 퍼포먼스를 하거나 팔다리 모양의 촉수가 덜렁덜렁한 괴물 의상을 입고 일본 도쿄 시내를 활보했다.
1997년에는 미국 뉴욕현대미술관(MoMA)에서 몸통에 수놓은 날생선을 유리장 안에 넣은 뒤 전시 기간 부패하면서 썩은 내가 진동하도록 한 설치작 '장엄한 광채'를 전시했다가 악취 문제로 중도 철거되기도 했다.
1990년대 후반부터는 인간과 기술, 유기체와 기계의 관계에 주목하며 조각, 설치작품 등으로 작품 세계를 확장했다. 이번 전시는 이불의 1990년 후반부터 최신까지 작품 흐름을 볼 수 있다.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여전사'라 불리던 과거 수식어를 넘어선 작품이 나오는 것 같다는 말에 "사람들이 규정한 것이고 나는 스스로를 규정하지 않는다. 나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며 "나는 내 관심사를 계속 작품으로 꾸준히 만들어가고 있다"고 설명했다.

입구에서 관람객을 맞은 비행선 작품은 '취약할 의향-메탈라이즈드 벌룬'이다. 1937년 미국 뉴저지 상공에서 폭발해 36명이 사망한 당시 세계 최대 비행선 제플린사를 본뜬 작품이다. 기술의 진보와 이로 인한 인류의 멸망을 동시에 상징한다.
그 아래 조각상은 지난해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더 제네시스 파사드 커미션'을 위해 제작한 작품 '롱 테일 헤일로: CTCS #1'이다. 인체, 기계, 건축 파편이 뒤섞인 형태의 이 작품은 인간과 기술문명, 역사의 흐름을 표현한다.

전시장으로 올라가면 '블랙박스'라는 공간 이름처럼 검은색이 사방을 감싸고 있다. 여기에 검은색 거울을 바닥 등에 설치한 '태양의 도시 Ⅱ'가 밤바다처럼 깔려 있고, 그 위로 작가의 초기 작품인 '사이보그 W6'를 만날 수 있다. 사이보그는 불멸과 완전성에 대한 인류의 욕망을 탐구한 그의 대표작이다. 온통 검은 전시장 위에 매달려 있는 흰색 사이보그는 모든 시선을 끌어당긴다.
블랙박스에서는 1999년 베네치아(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소개된 노래방 작업 '속도보다 거대한 중력 I'도 만날 수 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두 번째 전시실 '그라운드 갤러리'로 내려가면 유리와 거울로 된 터널을 통과해야 한다. 작가의 머릿속으로 들어가는 작업이다.
이어 등장하는 설치작품 '비아 네가티바'는 일종의 미로 구조다. 미로 안은 수많은 거울로 돼 있어 수많은 나와 만날 수 있다. 누가 진짜 나인지 모르는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길을 찾는 과정은 진짜 나를 찾는 것과 같은 경험이다.
전시장 한쪽 벽면에는 작가의 드로잉과 페인팅, 조각 습작 등 약 100점이 넘는 작품이 높은 층고의 벽면을 가득 채운다. 이들 작품만으로도 전시실 하나를 꾸밀 수 있는 분량이다. 작가가 작업 전에 미리 만들어 본 모형 작품이 놓여 있어 전시장 내 실제 작품과 비교해 보는 재미도 있다.

또 다른 면에는 작가가 2000년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작업한 평면 연작 '퍼듀'와 또 다른 평면 연작 '무제(취약할 의향-벨벳)'가 한가득 걸려있다.
이불은 초기 퍼포먼스에서 시작해 조각, 설치를 거쳐 2000년대 후반부터는 평면 회화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평면 회화지만 안료에 자개나 돌가루 등을 혼합한 뒤 층층이 쌓아 올리고 그 표면을 갈아내는 작업으로 입체감을 보여준다.

설치작품 '오바드Ⅴ'는 2018년 남북정상회담 후 군사적 긴장 완화의 상징으로 남북이 비무장지대(DMZ) 내 최전방 감시초소(GP)를 철거한 뒤 나온 폐자재로 만든 구조물이다. 이데올로기의 그림자와 화해를 암시하는 작품이다.
이불은 이전부터 이데올로기를 작품의 기반으로 삼았는데 2000년대 초에는 이데올로기는 이제 지나간 이야기가 아니냐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20년이 지난 세계는 여전히 이데올로기의 극단 속에서 반목하고 있다.
이불은 "과거는 지나가는 것도, 잊히는 것도 아니고 늘 현재로 돌아온다. 10∼20년 전에 다뤘던 사회적 문제를 우리는 한 번도 극복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갈등에 대해 "'너무 지나간 일'이라고 느낀다면 인류를 위해 좋은 일"이라고 말했다.
전시를 기획한 곽준영 리움미술관 전시기획실장은 "이불 작가는 기존 시각에서 벗어나 미술, 건축, 문학, 사회 이론과 철학적 사유를 넘나들었다"며 "인류의 과거와 현재를 성찰하고 가능한 미래에 대한 확장된 사유를 이끌어 온 작가의 폭넓은 작품세계를 경험할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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