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편집자 주 = 한국국제교류재단(KF)의 지난해 발표에 따르면 세계 한류 팬은 약 2억2천5백만명에 육박한다고 합니다. 또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초월해 지구 반대편과 동시에 소통하는 '디지털 실크로드' 시대도 열리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한류 4.0'의 시대입니다. 연합뉴스 동포·다문화부 K컬처팀은 독자 여러분께 새로운 시선으로 한국 문화와 K컬처를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되고자 전문가 칼럼 시리즈를 준비했습니다. 시리즈는 주간으로 게재하며 영문 한류 뉴스 사이트 K바이브에서도 영문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나는 달리고 싶다고 말하지 않는다. 또 달렸어야 했다고 후회하지도 않는다. '달리기'는 내게 늘 현재진행형이다.

지금 달리고 있다는 사실, 발밑을 바라보며 삶의 유한함을 느끼는 그 순간, 나는 살아있음을 느낀다.

달리기란 그런 것이다. 대단한 과거의 성취나 허황된 미래의 목표와 무관하게, 이 순간 한 발 한 발을 내디디는 지금의 나를 확인하는 일이다.

그런 나에게도 예외는 있다. 바로 '마라톤 대회' 참가를 준비할 때다. 그때만큼은 '달리고 싶다'는 욕망이 분명히 생긴다.

추첨을 기다리며 마음을 졸이고, 참가권을 얻기 위해 스스로를 설득하게 된다.
지난해 봄, 오사카와 도쿄 마라톤 추첨에서 모두 떨어진 후, 나는 우연히 나고야 마라톤의 추가 접수 공지를 발견했다. 항공권은 저렴했고, 마일리지 항공권도 남아 있었다. 가야 할 이유는 딱히 없었지만, 가지 말아야 할 이유도 없었다.
이유 없는 선택이 오히려 좋은 결과를 낳는다는 걸 알기에, 나는 나고야행을 결심했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달리기 위해 여행을 떠나는 사람'이 됐다.
여정은 조용히 시작됐다. 숙소는 평범했고, 초밥집은 로비 직원의 추천으로 찾았다. 새로운 도시의 공기를 마시고, 무작정 걸으며 익숙해지기를 기다렸다. 낯선 곳에서 달리기 위해 시간을 들이고 감각을 여는 일은 언제나 즐겁다.
나고야 마라톤은 세계에서 가장 큰 여성 마라톤 대회로 꼽힌다. 3만명 이상이 참가하며, 완주자에게는 고급 보석 브랜드의 기념품이 제공되는 것으로 유명하다. 과거에는 티파니 목걸이였고, 지금은 바카라에서 제작한 크리스털 컵을 준다. 이 화려한 상징 외에도 나고야 마라톤이 가진 진짜 가치는 역사에 있다.
여성 마라톤은 1984년 LA 올림픽에서야 정식 종목이 됐다. 그전에는 여성이 마라톤하면 자궁이 떨어진다는 말도 안 되는 주장으로 여성의 참여를 막았다. 1966년, 로베르타 깁은 남성복을 입고 보스턴 마라톤을 무단 완주했고, 1967년에는 캐서린 스위처가 중성적인 이름으로 참가해 등번호를 빼앗으려는 조직위원회 관계자를 뿌리치고 완주하며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나고야는 1980년부터 여성 엘리트 대회를 개최했고, 2012년부터는 일반 참가자도 받아들이며 지금의 여성 마라톤 형식을 완성했다. 단지 마케팅을 위한 이벤트가 아니라, 여성의 스포츠 참여 확대와 권리 신장을 담아낸 역사적 성과다.
나고야 마라톤은 도시 전체가 무대다. 대회 출발점과 도착점은 나고야 최대의 실내 경기장 '반테린 돔'에서 이뤄진다. 짐 보관, 박람회, 이동 동선까지 모든 것이 효율적으로 배치돼 있다. 일본답게 사소한 부분까지 세밀하게 배려돼 있으며, 특히 여성 참가자 비율이 높은 대회의 특성을 감안해 경기장 내부 대부분의 화장실이 여성용으로 운영된다.
출발 대기 공간에서는 1만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바닥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모두가 기다림 속에서 명상에 가까운 고요한 순간을 공유했다. 바람은 차갑고 햇볕은 따뜻했다. 각자의 온기가 서로에게 전해지는 그 감각은, 그 어떤 경쟁보다 소중했다.
출발 직전, 모두가 시계를 준비하며 조용히 출발선 앞에 섰다. 국내 대회처럼 카운트다운과 박수 대신, 고요하게 "탕" 하는 출발 신호와 함께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고야 도심은 크지 않았다. 그래서 반환점이 많다. 코스 설계도 훌륭해서 다른 주자들과 마주 보며 달릴 수 있는 구간이 자주 나온다.
여성 풀코스 참가자들과 나란히 달리는 순간도 있었고, 하프 코스 선두 그룹과 마주치는 순간도 있었다. 빠르게 내 옆을 스쳐 가는 이들의 발걸음에서 나는 힘을 얻었다. 마라톤은 각자의 속도로 뛰지만, 함께하는 것이다.
나는 달리며 내 삶의 반환점을 떠올렸다.
몇 번의 큰 결정, 몇 번의 뜻밖의 전환, 그리고 그사이의 수많은 갈림길.
이전엔 반환점을 돌며 왠지 초라해지는 기분이었지만, 이번엔 달랐다. 내게 있어 반환점은 다시 달릴 수 있는 '출발선'이었다.
마지막 반환점을 지나며, 나는 결심했다. 이곳에 다시 오자고. 그때는 더 많은 여유와 확신을 품고 달리자고. 이번 나고야 마라톤은 나의 '달리고 싶다'는 욕망을 '달렸음'으로 끝내지 않고, 또다시 '달리고 싶다'로 이어지게 했다.
마라톤은 끝이 아니다. 여행처럼, 삶처럼, 달리기는 계속된다.
반환점에서 다시 달리는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건, 단 한 발짝 내딛는 용기일 뿐이다.
김정욱 (크루 및 작가 활동명 : KIMWOLF)
▲ 보스턴 마라톤 등 다수 마라톤 대회 완주한 '서브-3' 마라토너, 100㎞ 트레일 러너. ▲ 서핑 및 요트. 프리다이빙 등 액티비티 전문 사진·영상 제작자. ▲ 내셔널 지오그래픽·드라이브 기아·한겨레21·주간조선·행복의 가득한 집 등 잡지의 '아웃도어·러닝' 분야 자유기고가.
<정리 : 이세영 기자>
sev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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