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백한 지구를 위한 시·보조 영혼

(서울=연합뉴스) 황재하 기자 = ▲ 수평에 쉬다 = 조승래 지음.
"지하에서 지면으로 나온 개미와 지상에서 지면으로 나온 사람들 / 서로의 만남이 쉽지 않은 겨울이지만 / 누구나 수평에 등을 댄 채 잠들거나 깨고 / 그 익숙함으로 세상은 평등하다고 생각하며 산다" (시 '수평에 쉬다'에서)
많은 사람이 경쟁에서 우위에 서고 출세하기를 바라며 살아간다. 하지만 아무리 수직으로 오르고 또 올라도 결국 휴식을 취할 때는 수평으로 놓인 바닥에, 침대에, 의자에 몸을 기댈 수밖에 없다.
일상에서 얻은 깨달음을 간결하고 쉬운 시어로 풀어낸 조승래(66) 시인의 아홉 번째 시집이다. 경쟁에서 잠시 벗어나 삶을 새로운 눈으로 관조하는 시 80편이 수록됐다.
'문학청춘' 주필인 김영탁 시인은 표제작이 "일상에 숨은 실존적 통찰을 발견하고 이를 간결한 시적 언어로 풀어낸 조승래 시의 정수를 보여준다"며 "시인이 추구하는 '고요한 긍정의 시학'을 강하게 드러내는 대표작"이라고 평가했다.
황금알. 136쪽.

▲ 창백한 지구를 위한 시 = 이문재 외 21인 지음.
지구를 살리고자 하는 간절한 염원을 표현한 시와 산문을 엮은 책이다. 시인 22명이 시 한 편과 에세이 한 편씩을 실었다.
이문재 시인은 에세이에서 "'노후화 기술'은 지난 세기 초반, 미국 전구 생산업체처럼 제품의 수명을 일부러 단축시키는 기술"이라며 "일정 시간이 지나면 고장이 나도록 해, 새 제품을 구입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라고 소개했다. 이어 "전구 수명을 짧게 하면 단기적으로는 기업에 이윤을 가져다줄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자멸, 공멸하는 것"이라며 "소비량이 늘어나는 만큼 공멸의 시기가 빨리 다가온다"고 경고한다.
나희덕 시인은 에세이 '물구나무종이 된다는 것'에서 "인간이 숲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숲이 인간을 생각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라며 "이 질문을 계속 밀고 나가다 보면 숲이나 강, 바다에 사는 존재들을 좀 더 깊이 이해하게 되지 않을까"라고 물었다.
이 책은 환경부 인증을 받은 친환경 종이에 친환경 잉크인 소이 잉크로 인쇄됐다. 종이 낭비를 막기 위해 띠지를 두르지 않았다.
마음의숲. 236쪽.

▲ 보조 영혼 = 김복희 지음.
"보조 영혼이 다가와 이렇게 하라고 / 저렇게 하라고 일러준다 / 그러면 어떻게든 한다 몇 번이고 계속 다시 해낸다" (시 '보조 영혼'에서)
화자는 마트에, 백화점 지하에, 시장에 가서 열매들을 보고 매만져도 보고 친구들을 한 명 한 명씩 만난다. 화자의 행동과 그가 맺는 인연의 배후에는 해야 할 일을 일러주는 '보조 영혼'이 있다.
김복희 시인이 네 번째로 발표한 시집의 표제작이다. 표제작 외에도 이번 시집에는 영혼, 천국, 신 등의 시어가 반복해서 등장한다. 영적인 존재를 지칭하는 이 시어들은 화자가 자아를 성찰하는 과정에 실마리를 제공한다.
"평생 악하게 살아온 자가 죽기 전에 선한 일을 하는 것이 구원이라고 하더라. 악한이 되느라 일생 다 바치는 정성으로 겨우 구원을 받는다고! 아니 그런 깊은 뜻이. 하지만 대개는 살던 대로 살다 간다더라. 이제 나는 / 신의 꿈이 궁금해 / 신의 꽉 찬 잠을 돌아다니며 서랍을 다 엎는다." (시 '뜻대로'에서)
2023년 시인에게 현대문학상을 안긴 수상작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비롯한 7편의 시가 수록됐다.
문학과지성사. 1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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