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편집자 주 = 한국국제교류재단(KF)의 지난해 발표에 따르면 세계 한류 팬은 약 2억2천5백만명에 육박한다고 합니다. 또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초월해 지구 반대편과 동시에 소통하는 '디지털 실크로드' 시대도 열리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한류 4.0'의 시대입니다. 연합뉴스 동포·다문화부 K컬처팀은 독자 여러분께 새로운 시선의 한국 문화와 K컬처를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되고자 전문가 칼럼 시리즈를 준비했습니다. 시리즈는 매주 게재하며 영문 한류 뉴스 사이트 K바이브에서도 영문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 일부 앵커의 악센트 전도
최근 TV 속 일부 앵커의 읽기(리딩)에서 악센트 전도(顚倒)가 심각하다. 복합 명사(형)가 나오기만 하면, 기다렸다는 듯 뒤엣것에 힘을 준다. 시쳇말로 '있어 보여서'인가?
'신선한 공기('공기'에 악센트) | 푸드 세이버('세이버'에 악센트) | 미백 화장품('화장품'에 악센트) | 황금사자상('사자상'에 악센트) | 중년의 사랑('사랑'에 악센트) | 정치적 주장('주장'에 악센트) | 건조주의보('주의보'에 악센트) | 이름과 사진('사진'에 악센트) | 교육과정('과정'에 악센트) | 올가을('가을'에 악센트) | 학점 관리('관리'에 악센트) | 취업 비자('비자'에 악센트) | 검찰의 표정('표정'에 악센트) | 한국 영화('영화'에 악센트) | 공항 에피소드 ('에피소드'에 악센트)| 강제 퇴거('퇴거'에 악센트) | 취업 준비생('준비생'에 악센트) | 아침저녁('저녁'에 악센트) | 만 오천여 건('오천여건'에 악센트) | 면역 기능('기능'에 악센트) | 탈모 스트레스('스트레스'에 악센트)| 고급 정보('정보'에 악센트) | 성게 국수('국수'에 악센트) | 꽃 박람회('박람회'에 악센트) | 돌발 변수('변수'에 악센트) | 핵심 역할('역할'에 악센트) | 고가 장비('장비'에 악센트) | 거리 예술('예술'에 악센트) | 온 가족('가족'에 악센트) | 전면 중단('중단'에 악센트) | 뇌종양('종양'에 악센트) | 최고의 날씨('날씨'에 악센트) | 색깔 논쟁('논쟁'에 악센트) | 수학과 과학('과학'에 악센트) | 바이오 화학('화학'에 악센트) | 급성 폐렴('폐렴'에 악센트) | 해결 방법('방법'에 악센트) | 손편지('편지'에 악센트) | 후폭풍('폭풍'에 악센트)'
마치 무엇에 홀린 듯 모두 뒤의 단어에 무게중심을 둔다. 그리 길지 않은 단위 시간에도 이런 오류 현상을 수시로 접하게 된다.
이 황당하고 얼토당토않은 불상사의 이유는 뭘까?
혐의 중 하나는, 신체 언어의 겉멋에 젖은 '고갯짓 연출'의 파국이라고 본다. 의미 요소는 제쳐두고 제멋대로의 호흡에 맞춰 강조점을 찍다 보니 이런 변고(變故)가 터지는 것이다. 영어 등 구미어의 영향도 엿보인다.
일찍부터 외국어 텍스트에 노출되고 중간과 후미를 넘나드는 악센트 서핑에 미혹된 터에, 영미 방송의 현란한 표정 연출이 적이 멋스러워 보여 한국어 뉴스 읽기에 괴이하게 접목한 것 같다고나 할까.
한국어는 억양과 강세가 있긴 해도 그 폭이 도드라지지 않는다.
더구나 공적인 언어 공간에서는 정중어법(鄭重語法)에 대한 암묵지까지 작용하기에 그 정도가 완만해야 정상이며, 그래야 한국어답다.
강약·중 강약, 강약약·중강약약, 이 소중하고 빼어난 셈여림을 저버린, 약강식(弱强式)의 삐딱한 엇박자 리듬 탑재는 어불성설이다. 당연히 수용자·시청자는 거북스러운 이물감에 빠질 수밖에 없다.
음의 길이와 강세를 혼동하는 현상도 포착된다. 장음(長音)이라 쓰고 악센트라 읽는 꼴이다.
'사:람[사:람]'이 사람[싸람, 'saram]으로, '화:병(火病)[화:뼝]'이 화병[화뼝]으로, 무시로 탈바꿈한다. 장음 구사를 못 하거나 귀찮거나 몰이해한 안타까운 현상이다.
절정의 재앙은 악센트의 뒤바뀜도 모자라 자의적으로 동시에 이루어지는 '장음 강세로의 강제 모드 변환'이 다. 멀티 자책골이라고나 할까?
'아름다운 암굴왕'(暗窟王)하면 얼추 형용모순에 해당할 것이나 오늘도 HD 화면을 부단히 장식하는 이 '통탄할 읽기'가 소위 일부 인기 앵커에 의해 이뤄지고 있다.
각 방송사의 교육·훈련 기능이 실종된 탓이 가장 크다.
적절하고 효과적이며 근사한 말하기에 대한 관심은 매우 높다. 그러나 그에 앞서 정확하고 아름다운 읽기(리딩)에 대한 관심과 고찰이 필요하다. 기초가 되는 밑절미는 의당 개별 발음의 정밀한 음가 찾기라 할 것이다.
표준문자에 쏟는 에너지와 인프라의 반절만 표준발음 쪽에 투입해도 우리 발음·읽기·말하기가 진일보할 것으로 확신한다. 차제에 한국어의 표준 억양·표준 어조·표준 강세에 대한 파천황(破天荒)적 연구도 기대해본다.
관련 학계의 대가(Guru)들이 의기투합해 불가역적 대세인 읽기·말하기의 노둣돌을 쌓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다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본다.
◇ '이설주'와 '최용해'
'이설주', '최용해'는 대체 누구인가?
결론부터 말해 이제는 '리설주', '최룡해'가 맞는다. 실제로 사용되는 그 이름이라야 북한의 그 사람을 명백히 가리키게 된다.
그런 정보 전달력을 가짐으로써 남한 사람도 익숙하고 편하게 만든다. 즉 이젠 리설주, 최룡해라야 인지조화(認知調和)가 원활하다는 말이다.
주요 언론 매체 중 유독 한 신문만 아직도 '이설주', '최용해'를 고집하고 있다. 그러한 표기 방침은 아마도 다음 주장에 기반할 것이다.
"1992년 10월 19일 국어심의회 한글분과위원회는 원칙적으로 북한의 고유 명사 표기도 한글맞춤법을 준수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2013년 5월 30일 '최용해/최룡해, 이설주/리설주' 표기가 혼란스러워지자 국립국어원은 '량강도'와 '로동신문'도 '양강도', '노동신문'으로 쓰라며 '북한 고유 명사 표기 시 두음법칙 적용'을 재차 강조했다."
그런데 그러한 결정을 한 시점이 자그마치 30년이 넘었다. 그동안 남북 관계는 긴장과 화해 국면의 롤러코스터를 탔다. 우리 음운체계의 '두음법칙을 따르라'는 건조하기 짝이 없는 무신경한 결정에 안주할 때인가.
리설주만 봐도 그렇다.
"성(姓)이 사람의 혈통을 표시하는 고유명사로, 일상생활에서 본래 소리 나는 대로 사용해 온 사람에게까지 두음법칙을 강제해 기존에 쓰던 표기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헌법상 기본권인 인격권 또는 자기 결정권을 침해할 소지가 있다고 판단한다."
2007년 대법원판결이다.
그 예규로 라(羅)씨와 류(柳)씨를 '라', '류'로 적는 게 가능해졌다. '류현진'이 그 예이고, '라미란', '라종일', '라건아'도 있으며 심지어 남한의 이(李) 씨도 '리'로 적는 이가 존재한다.
최룡해는 게다가 두음법칙에 해당하지도 않는다. 남한 사람도 이름 중간 글자와 끝 글자에 수두룩하게 'ㄹ' 초성을 쓴다.
고려진, 명로준, 박라민, 최리현, 이미류, 김영라, 정래현, 황우루, 조린, 장룡 등.
내각 부총리 '리룡남'은 가장 당혹스러울 것이다. "당신 이름이 남한에서는 이용남입네다!"라고 하면 "뭐라, 이용남? 와! 고조 내레 감격시럽구만" 하고 반응할까?
그렇게 상상하기 어렵다. 그 반대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사람 이름자에 쓰일 때 복수 표기가 가능한 한자가 꽤 있다. 龍 (용/룡), 倫(윤/륜), 烈(열/렬), 律(율/률), 林(임/림/님), 魯(노/로), 麟(린/인), 羅(라/나), 來(래/내), 利(리/이), 麗(려/여) 등이다.
'선동열'은 사실 '선동렬'이 옳다. 그러나 가장 큰 기준은 본인의 의사다. 그래서 '선동열'이다.
윤석열 전 대통령은 묘하다. 열 자가 기쁠 열(悅)이다. '렬'이 아니다. 그래서 [윤서결]로 소리 나는 게 설득력 있으나, 과거 검찰 출입 기자들이 물었을 때 본인은 어려서부터 주위에서 [윤성녈]로 불렀다고 하면서 [윤성녈]로 발음해달라고 밝힌 바 있다. 그러면 [윤성녈]이다.
고 강원룡 목사는 [강원뇽], [강월룡] 둘 다 가능하나 본인이 [강월룡]을 선택한 것으로 알고 있다. 원로 아나운서 황인용도 '龍' 자를 쓰는데, 이분은 '용'으로 표기하는 바람에 자연스레 [황이뇽]이 됐다.
'령'자도 재밌다. 고 이어령 선생은 '령', 신궁(神弓)이라 불렸던 양궁의 김수녕 선수는 '녕', 저술가 리영희는 '영'으로 썼던 것이다.
빼놓은 게 있다. 국내의 수많은 진짜 '이설주', '최용해', '이용호', '이용남' 들이다.
자신의 이름을 TV 뉴스 속 북한 소식에서 접할 때마다 어떤 기분이겠는가 말이다. 짐작건대 뜻 모를 당혹감, 더 나아가 열패감 비슷한 기분이 들지 않을까?
이분들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아니, 왜 난데없이 리설주. 최룡해, 리용호, 리룡남이라는 명백한 북한인 이름이 내 이름으로 둔갑해 나를 당황스럽게 하는가!'
이런 게 바로 '정보의 관리와 해석'이라는 지평이다. 북한 인명이라는 정보를 어떻게 관리하고 해석해야 수용하는 사람들이 혼란을 겪지 않고 동의할 수 있는가.
가장 중요한 이 대목을 국립국어원은 간과한 것으로 보인다. 안타깝다.
강성곤 현 KBS 한국어진흥원 운영위원
▲ 전 KBS 아나운서. ▲ 정부언론공동외래어심의위원회 위원 역임. ▲ 현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언어특위 위원. ▲ 전 건국대·숙명여대·중앙대·한양대 겸임교수. ▲ 현 가천대 특임교수.
* 더 자세한 내용은 강성곤 위원의 저서 '정확한 말, 세련된 말, 배려의 말', '한국어 발음 실용 소사전'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정리 : 이세영 기자>
sev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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