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honey] '역사 1번지' 청주 중앙공원
연합뉴스
입력 2025-05-14 08:00:07 수정 2025-05-14 08:00:07
900년 거목과 1천년 국보를 찾아서


팔작지붕에 2층 누각 형식의 망선루 [사진/임헌정 기자]

(청주=연합뉴스) 권혁창 기자 = 드라마 '더 글로리'에서 여자 주인공 동은(송혜교)이 바둑을 배우는 곳이 바로 청주 중앙공원이다.

바둑판 뒤로 아름드리 거대한 은행나무가 계절의 흐름에 맞춰 옷을 갈아입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그런데 만약 동은이 공원의 역사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다면 이곳에서 바둑만 두진 않았을 것 같다.

최근 복원된 청주읍성 성곽의 일부 [사진/임헌정 기자]

◇ 청주읍성과 35m 성곽

청주 한복판에 있는 중앙공원은 면적이 2만4천평(7만9천여㎡) 정도인 작은 도시공원이다. 끝에서 소리치면 반대편에서 다 들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작은 공간에 압축된 이야기들을 풀어내 보면 그 시공의 크기는 반도의 허리를 점하고도 남지 않을까.

공원 주차장에 차를 대고 서쪽 입구로 들어가다 보면, 공원 담장인 듯 돌로 쌓은 성벽이 보인다.

윗부분이 잘려 나간 대원군 척화비 [사진/임헌정 기자]

길이 35m, 높이 3.6m. 최근에 복원된 성곽의 일부라고 한다.

여기에 성곽이 있는 이유는 분명하다. 청주읍성이 있던 자리이기 때문이다.

청주읍성은 조선시대에 쌓았지만, '삼국사기'에 따르면 통일신라가 서원경(청주의 옛 이름)에 689년 축조한 성벽이 청주읍성의 전신이니, 이곳에 처음 성을 쌓은 건 1천300여년 전 일이 된다.

잎의 모양이 오리 발가락을 닮았다고 '압각수'로 불린 은행나무 [사진/임헌정 기자]

◇ 과거시험과 하수구 뚜껑

광장이라고 하기엔 조금 쑥스러운 공원 중앙 공간에선 동네 주민들이 음악에 맞춰 건강 체조를 하고 있다.

점심시간이 가까워져 오니 무료 급식소 앞에 어르신들의 줄이 길게 늘어섰다. 동네 공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정겨운 풍경이다.

그 너머로 멀리서 봐도 꽤 오랜 역사를 지닌 듯 보이는 팔작지붕에 2층 누각 형식의 한옥 목조 건물이 우뚝 서 있다.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안동에 갔다가 돌아오며 수개월간 머물렀을 때 과거시험을 관장하고 합격자 방도 써 붙였다는 망선루(望仙樓)다.

정면에서 보니 위풍당당하다. 원래 이름은 '취경루'인데 조선 세조 7년에 수리하면서 한명회가 현판을 망선루라고 썼다고 한다.

조선시대 충청도를 지키던 병영의 출입문인 충청도병마절도사 영문 [사진/임헌정 기자]

작다고 지나치면 안 될 게 망선루 바로 옆에 있다. 윗부분이 잘려 나간 대원군 척화비다.

대원군이 1871년 신미양요 뒤 전국의 요충지에 세웠다는 척화비는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곧 화친하는 것이며,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라는 내용이다.

이 척화비는 청주 시내 하수구 뚜껑으로 사용하고 있던 것을 1976년 발견해 여기로 옮겼다고 한다.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36호인 청주 조헌 전장기적비 [사진/임헌정 기자]

◇ 전설의 증거물, 압각수

망선루 앞에서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리면 누구나 감탄사를 피하기 어려운 거목과 마주한다.

고려시대에 숨쉬기 시작해 900년 풍상(風霜)을 멀쩡히 견뎌온 이 은행나무는 지금도 가을이면 온몸을 샛노랗게 물들인다고 한다. 가을에 다시 와야 할 이유다.

잎의 모양이 오리 발가락을 닮았다고 '압각수'(鴨脚樹)라 불리는데, 씨를 심으면 손자 대에나 열매가 열린다고 해서 '공손수'(公孫樹)라고도 부른다.

용두사지 철당간 [사진/임헌정 기자]

은행잎 모양을 따서 지어진 이름인 만큼 전국에 압각수라 불리는 나무가 여럿 있지만, 개중 가장 유명한 압각수라고 해야 하겠다.

압각수는 고려 말 이색, 권근 등 10여명이 모함을 받고 청주옥에 갇혔는데 홍수로 고을이 물에 잠기자 이 나무에 올라가 죽음을 면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또 다른 기록에는 홍수 당시 죄수들이 압각수 10여 그루에 올라갔는데 죄가 있는 사람들이 있던 은행나무는 물에 떠내려갔고 죄 없는 사람이 올라간 은행나무만 살아남았다는 얘기도 전해온다. 압각수가 유일한 증거물인 역사유적 전설이다.

 

◇ 비석이 숲을 이루다

압각수 남쪽에는 망선루보다는 작은 한옥 건물이 또 하나 있다. '충청도 병마절도사영문'이다. 이름을 쉽게 풀면 조선시대 충청도를 지키던 병영의 출입문이다.

전금숙 청주시 문화관광해설사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뒤 해안 위주의 방어선을 보완하기 위해 원래 서산 해미읍성에 있던 충청 병영을 1651년 내륙의 중심부인 이곳으로 옮긴 것"이라고 설명했다.


공원의 북쪽 끝에는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 조헌이 영규대사가 이끄는 승병, 박춘무의 의병 등과 합세해 청주성을 탈환한 것을 기념한 조헌·영규대사·박춘무의 '전장기적비'도 각각 하나씩 있다.

비석은 또 있다. 청주 목사를 지낸 이이가 재직 당시 제정한 서원향약을 기리는 기념비, 1949년에 세운 독립기념비, 조선 말기 공원 인근에서 처형된 천주교 순교자들을 위한 순교자현양비도 있다.

이렇듯 좁은 공간에 역사성을 지닌 비석이 즐비하니 '비림(碑林)공원'이라는 별칭을 가질 만도 하다.


◇ 천년의 유산

여기까지 보고 돌아가면 안 된다. 천년을 향해가는 나무를 봤으니, 천 년 전에 쇠로 만든 기둥도 봐야 한다.

공원 내부는 아니지만, 동쪽으로 공원을 나가면 다음 골목에 쇠기둥 하나가 우뚝 서 있으니 바로 '용두사지 철당간'이다.


이곳엔 청주읍성 이전에 용두사라는 절도 있었다. 당간이란 사찰 앞에 부처의 위신과 공덕을 나타내고 깃발을 달기 위해 세워놓는 기둥이다.

철로 만든 이 당간을 고려 광종 13년(962년)에 제작했다는 사연이 철당간 밑에서 3번째 철통에 정확히 기록돼 있다.

전금숙 해설사는 "철로 만든 당간은 전국에 딱 3개(청주 용두사지, 공주 갑사, 안성 칠장사)가 남아 있는데 철통에 조성연대가 정확히 기록된 건 이것이 유일하다"고 했다.

이 철당간은 국보 41호다.

지도를 보면 한반도 중앙에 청주가 있고 청주의 중앙에 중앙공원이 있다. 이런 지정학적 조건이 역사 1번지를 만들지 않았을까.

900년 된 나무와 1천년 된 철당간을 생각하며 주차장으로 걸어가다가 공원 안에서 신기한 나무를 발견했다.

커다란 은행나무 안에서 자작나무가 공생하는 게 아닌가. 은행나무가 자작나무를 곱게 품고 있었다. 자기 새끼가 아닌데도.


※참고 자료

1. 청주 압각수(鴨脚樹) 전설의 전승력과 '홍수' 화소의 지역성(황인덕, 2008)

2. 청주 용두사지 철당간의 특징과 건립배경 연구(서지민, 2024)

3. 청주시 문화관광 홈페이지(https://www.cheongju.go.kr/ktour/index.do)



※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5년 5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faith@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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