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항상 악", "미국은 아름다운 모자이크" 카터 말말말
연합뉴스
입력 2024-12-30 07:38:24 수정 2024-12-30 08:10:56
"대통령이었을 때 보다 나은 '전임 대통령", "내 나이 겨우 80살"
"왜 최선 다하지 않았나" 해군시절 질책, 평생 좌우명 삼아
"김일성 총명", "트럼프가 북미평화협정 성공시 노벨상" 한반도에 관심…"트럼프 4년 더는 재앙"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의 2015년 모습 [AP=연합뉴스 자료사진]

(워싱턴=연합뉴스) 강병철 특파원 = 29일(현지시간) 미국 정치사상 역대 대통령 중 최장수 기록을 세우고 세상을 떠난 지미 카터.

카터 전 대통령은 해군 장교와 조지아주 상원의원, 주지사를 거쳐 1977∼1981년 39대 미국 대통령을 지냈다.

재임 시절 "인권이야말로 우리 외교 정책의 영혼"이라고 수차례 강조할 정도로 인권 가치를 전면에 내세웠다.

하지만 이런 그의 도덕주의 외교정책은 이상주의적이라는 지적에 직면했다.

더욱이 1979년 11월부터 1981년 1월까지 이어진 이란의 미국대사관 인질사건, 1979년 12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등 임기 후반부 잇따른 '외교 참사' 논란에 휘말린 끝에 1980년 대선에서 재선에 실패, 단임 대통령에 그쳤다.

"내가 대통령이었을 때보다 나은 '전임 대통령'임을 부인할 수 없다"는 본인의 고백대로 카터 전 대통령의 진가는 오히려 1981년 퇴임 이후부터 드러나기 시작했다.

민간외교와 사회운동, 해비타트 사랑의 집짓기 운동 등 활발한 사회 활동을 벌이며 재임 때보다도 국제사회에 영향력을 미쳤다는 평가를 받았다.

2002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면서 "전쟁은 항상 악이고, 절대로 선이 될 수 없다"고 발언하는 등 꾸준히 반전 운동에 기여했다.

1994년 전격 방북해 당시 김일성 주석과 회담, 김영삼 대통령과의 남북정상회담을 주선하는 성과를 이루는 등 한반도 통일을 위해서도 목소리를 냈다. 다만 그 직후 김 주석의 사망으로 남북정상회담의 결실은 보지 못했다.

카터 전 대통령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면서도 과학적·사회적 논쟁에 진보적인 견해를 보이는 열린 마음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카터의 직접 발언은 아니지만, 그가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던 "왜 최선을 다하지 않았는가"(Why not the best)에 얽힌 일화도 유명하다.

카터 전 대통령은 1946년 당시 해군사관학교를 동기 823명 중 59위라는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이후 장교 임관을 위한 면접에서 하이먼 리코버 제독이 "최선을 다했나"라고 물었는데, 처음에는 "네"라고 대답했다가 "아니오, 항상 최선을 다 한 것은 아닙니다"라고 고쳐 답했다고 한다.

카터 전 대통령은 훗날 당시 장면에 대해 "리코버 제독이 '왜 최선을 다하지 않았나'라며 절대 잊을 수 없는, 절대 대답할 수 없는 마지막 질문을 해왔다"고 돌이켰다. 이 표현은 그가 대선에 출마하던 1975낸 펴낸 회고록 제목으로도 쓰였다.

카터 전 대통령은 77년을 함께 하다 지난해 11월19일 '완전한 파트너' 로절린 여사를 떠나보낸 지 1년 1개월여 만에 그 곁으로 가게 됐다.

2014년 킹 목사 연설 5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한 카터 전 대통령(왼쪽에서 두번째)과 오바마 전 대통령(왼쪽), 미셸 오바마 여사(오른쪽에서 두 번째), 클린턴 전 대통령 [EPA=연합뉴스 자료사진]

다음은 그가 남긴 주요 어록이다.

▲ 그 어떤 경제 체제라도 실업에서 가치나 미덕을 발견한다면 그 체제는 파산할 것이다. (1976년 7월 15일 대통령 후보직 수락 연설에서)

▲ 미국은 용광로가 아니다. 우리는 이 곳에 와서 서로 섞여 산다고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는 않는다. 미국은 그보다는 아름다운 모자이크에 가깝다. (1976년 10월 10일 노트르담대 강연에서 인권에 대해 발언하며)

▲ 우리 스스로 진실되기 위해서는 다른 이에게도 진실해야만 한다. (1977년 1월 20일 대통령 취임 연설에서 외교 기조를 언급하며)

▲ 이제 우리는 자신의 미래에 대해 자신감을 갖게 됐고, 공산주의에 대한 과도한 두려움에서도 자유로워졌다. (1977년 5월 22일 노트르담대 졸업식 연설에서)

▲ 미국은 지구상에서 가장 많은 변호사들이 집중돼있는 곳이다. 우리에게는 많은 소송이 있지만, 많은 정의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1978년 5월 4일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변호사협회 100주년 축사에서)

▲ 인권이야말로 우리 외교 정책의 영혼이다. (1978년 12월 6일 백악관에서 열린 세계인권선언 30주년 기념 행사에서)

▲ 한 세대가 지나고 나면 이 태양광 난방기는 그저 호기심의 대상이 되거나, 박물관의 전시품이 되거나, '가지 않은 길'의 한가지 사례가 될 수도 있다. 아니면 이는 미국인들이 시작한 가장 위대하고 흥미로운 모험의 일부가 될 수도 있다. (1979년 6월 20일 백악관 지붕에 32개의 태양광 패널을 설치하면서. 카터가 재선에 실패한 후 백악관에 입성한 후임자 로널드 레이건은 이를 철거했고, 해당 전지판들은 실제 스미스소니언 박물관 등지로 보내졌다.)

▲ 성실한 노동과 튼튼한 가정, 긴밀한 공동체, 그리고 우리의 신앙을 자랑스러워하던 나라에서 이제는 너무 많은 이들이 자기방종과 소비만 숭배하는 경향이 있다. 더는 인간의 정체성이 어떤 일을 하는지에 따라 정의되지 않고, 무엇을 소유하는지에 따라 정의된다. (1979년 7월 15일 오일쇼크가 정점에 달했던 당시 대통령 별장 캠프 데이비드로 초청한 각계 인사를 대상으로 한 '자신감의 위기' 연설에서)

▲ 전면적인 핵전쟁이 벌어진다면, 2차 세계대전 시기를 모두 합친 것보다 더 파괴적인 힘이 매초마다 뿜어져나올 것이다…미국이 인권을 발명한 것은 아니다. 사실은 그 반대로, 인권이 미국을 만들어 냈다…절대 유혹에 굴해서는 안된다. 미국적 가치는 사치재가 아닌 필수재다. (1981년 1월 14일 퇴임 연설에서)

2015년 교회 일요 교실에 참석한 카터 전 대통령 [AP=연합뉴스 자료사진]

▲ 나는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성당에 그린 흰 수염의 하나님 모습에 영향을 받았던 어린 시절을 제외하고는 창조주를 그 어떤 인간의 모습에 비춰서도 상상해본 적이 없다. 신이 남자인지 여자인지에 대한 떠들썩한 논쟁이 내게는 우스꽝스럽게 느껴진다. (2001년 저서 '살아 있는 신앙'에서)

▲ 전쟁이 가끔 필요악이 될 수는 있다. 하지만 얼마나 필요할지와 상관없이 전쟁은 항상 악이고, 절대로 선이 될 수 없다. (2002년 12월 10일 노벨평화상 수상 연설에서 이라크전에 반대 목소리를 내며)

▲ 기독교 신앙은 지질학, 생물학, 천문학에서 입증된 사실들과 양립불가능하지 않다. (2004년 1월 30일 CNN 인터뷰)

▲ 지난 몇 달 동안의 극단주의가 얼마나 큰 변화를 낳았나. 미국은 동맹국들을 소외시키고, 우방국들을 실망시켰으며, 혼란스럽고 불안한 선제공격 전략을 선포함으로써 의도치 않게 적들을 만족시키기까지 했다. (2004년 7월 26일 민주당 전국위원회 연설에서 9·11 테러 이후 시행된 조지 부시 행정부의 강경한 안보정책을 비판하면서)

▲ 1976년 당시 나는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아마도 내가 대통령이 된 것은 레드퍼드 때문일 것 (2004년 9월 제럴드 포드 당시 현직 대통령과 맞붙었던 지난 1976년 대선 후보 토론회를 앞두고 영화배우 겸 제작자 로버트 레드퍼드로부터 '특별과외'를 받았다는 사실을 털어놓으며)

▲ 은퇴할 나이가 되면 당연히 은퇴하겠지만, 아직 결정하지 않았다. 사실 내 나이 겨우 80살이고 몇년동안은 더 생산적인 일을 할 여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80세 생일을 맞은 2004년 10월 1일 NBC와의 인터뷰에서)

▲ 이라크 전쟁은 부당하다. 예전에도 그렇게 생각했고, 지금도 이라크 침공이 불필요했으며 부당했다고 생각한다. (2005년 7월 30일 폭스뉴스 보도)

▲ 내가 대통령이었을 때보다 나은 '전임 대통령'임을 부인할 수 없다. (2005년 11월 3일 워싱턴포스트 보도)

▲ 김일성 주석은 대동강 뱃놀이에 나를 초청했다. 내 운을 시험해 보기로 했다. 김영삼 대통령과 즉각 정상회담을 할 것을 요청했는데 김 주석은 선뜻 동의했다. (2007년 10월 회고록 '백악관을 넘어'에서 1994년 방북 당시 김일성 북한 주석과의 회담을 회상하며)

▲ "그(김일성)는 매우 총명했고 영리했다. 자신의 나라에 대한 모든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모든 건물들에 대해 언제 지었는지, 무슨 건물인지 등을 알고 있었다. (2009년 11월 23일 태국 더네이션지 회견에서 김 주석과의 회담을 회상하며)

▲ 내 역할이 다른 전직 대통령들보다 우월하다. (2010년 9월 20일 NBC뉴스 앵커인 브라이언 윌리엄스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퇴임 후 활동을 자화자찬하며)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2010년 방북 때 김영남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면담하는 모습 [EPA=연합뉴스 자료사진]

▲ 지난 첫 90년은 좋았다. (2014년 10월 90세 생일을 맞아 애틀랜타 카터센터 예배실에서 열린 축하모임에서)

▲ 이번 주 정밀검사를 받았는데 암이 사라진 것으로 확인됐다. (2015년 12월6일 조지아 주 플레인스의 머라나타 침례교회에서 열린 '카터 성경 교실'에서 암 완치 사실을 공개 선언하며)

▲ 이 회담은 그동안 내가 우리 동맹국 지도자들과 가진 토론 가운데 아마도 가장 불쾌한 토론이었을 것이다. 박정희의 젊은 딸이자 북한 암살범에게 살해된 어머니를 대신해 당시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맡고 있던 박근혜 덕에 분위기가 어느 정도 누그러지긴 했다. (2018년 2월 구순을 기념해 펴낸 회고록 '지미 카터'에서 1979년 6월 방한 당시 박정희 전 대통령과 가졌던 회담을 회고하며)

▲ 트럼프 취임 이후 최악의 실수다. 우리 나라에 재앙. (2018년 3월26일 존 볼전 국가안보회의(NSC) 보좌관 기용에 대해)

▲ 북한과 미국 양쪽 다 수용할 만한 평화협정을 얻어내는 데 성공한다면 노벨상을 받을 자격이 있다. 전임 대통령들은 실현하지 못했던, 가치 있고 중대한 업적이 될 것이다. (2018년 5월22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의 북미정상회담을 앞둔 도널드 트럼프 당시 미국 대통령에게 훈수하며)

▲ 4년 더 트럼프를 겪어야 하는 것은 재앙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2019년 9월 18일 애틀랜타저널컨스티튜션 보도. 미국 대선을 앞두고 트럼프 당시 대통령을 이길 수 있는 민주당 후보로 버니 샌더스에게 투표했다고 설명하며)

▲ 생명을 살리기 위해 마스크를 꼭 착용해달라. (2020년 7월 12일 카터 센터 트위터 공식 계정을 통해 부인 로절린 여사와 함께 흰색 마스크를 쓰고 찍은 사진을 공개하며. 이날은 미국내 마스크 착용 논쟁의 중심에 섰던 트럼프 당시 대통령이 처음으로 마스크를 착용한 채 공식 일정을 소화한 날이기도 하다)

▲ (결혼생활 내내 내게) 꼭 맞는 여성이 돼 줘서 특별한 감사를 표하고 싶다. 정말 많이 사랑한다. (2021년 7월 10일 고향인 미국 조지아주의 작은 마을 플레인스의 한 고등학교에서 열린 결혼 75주년 기념식에서 부인 로절린 여사에게)

▲ "로절린은 내가 이룬 모든 것에서 동등한 파트너였다. 그녀는 내가 필요할 때 조언과 격려를 해주었다. 로절린이 세상에 있는 한 나는 누군가 항상 나를 사랑하고 지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 2023년 11월 19일 77년을 해로한 뒤 먼저 세상을 떠난 부인 로절린 여사를 추모하는 성명에서)

(애틀랜타 AP=연합뉴스)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28일(현지시간) 조지아주 애틀랜타 에모리대학 내 교회에서 열린 부인 로절린 여사의 추모예배에 참석하고 있다. 로절린 여사는 지난 19일 조지아주 플레인스의 자택에서 향년 96세로 별세했다. 2023.11.29 danh2023@yna.co.kr

soleco@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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