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란 무엇일까요. 국가폭력의 트라우마를 겪으며 찾는 것은 다시, 역사입니다. 사전은 [인류 사회의 변천과 흥망의 과정. 또는 그 기록]이라고 역사를 설명합니다. 정확하다는 사전적 풀이이지만, 뭐랄까 좀 싱겁습니다. 빈약합니다.
책장에서 E.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를 꺼내어 뒤적거리게 된 이유입니다. 책의 인쇄ㆍ발행 연도를 보니 대한민국 민주화를 상징하는 1987년, 봄이네요.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 간 상호작용의 부단한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카는 말합니다. 유명한 정의입니다. 역사는 또한, 획득된 기량이 세대에서 세대에 전승되는 것을 통해서 이뤄지는 진보라고 그는 덧붙입니다. 역사가의 통찰입니다.
이 희소한 명저는 역사책에 기록될 사건의 원인 분석이 중요함을 일깨웁니다. 원인을 잘 파악해야 올바른 교훈을 얻을 수 있어서일 것입니다. 다음 일을 예측하고 방비하고 대처하는 데 필수입니다. 책은 실감 나는 예를 듭니다. 파티에서 과음한 A가 브레이크가 시원찮은 차를 몰고 귀가하던 길입니다. 앞이 전혀 보이지 않는 블라인드 지점에 이르렀을 때 모퉁이 가게에서 담배를 사려고 길을 건너던 B를 치어 숨지게 합니다. '우리'는 사건의 원인 분석에 들어갑니다. 과음 탓이다, 시원찮은 브레이크 탓이다, 블라인드 도로 환경 탓이다 등등. 이때 두 사람의 명사(名士)가 나타나 주장합니다. B의 담배에 대한 욕망이야말로 그의 사인이라며 이를 무시한 조사란 시간 낭비일 뿐이라고. 둘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책은 묻고 바로 답합니다. 문밖으로 내보내라고요.
두 명사의 주장은 허무합니다. 흡연자가 아니었다면 죽을 일도 없었을 거라는 말인데, 뭔가 석연치 않습니다. 차라리 태어난 것이 죽은 것의 원인이라는 분석이 더 낫겠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지구상의 모든 남자의 키는 170㎝이거나 그렇지 않다는 명제는 늘 참입니다. 이 명제가 참인 것만큼이나 둘의 분석은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게 없어서 허망합니다. '클레오파트라의 코'처럼 이들은 우연을 너무 깊이 끌고 들어온 것입니다. 이와 같은 교통사고를 줄이려면 흡연자를 줄여야 한다는 정책 처방을 내놓을 판입니다. 황당합니다. 그런 분석도, 그런 처방도 현실에서 부지기수로 봅니다. 매번 놀라고 또 놀랍니다.
역사가는 사실의 천한 노예도 아니요, 억압적인 주인도 아니라고 카는 단언합니다. 이 문장의 주어가 어디 역사가뿐일 리 있겠습니까. 비천한 노예가, 그리고 난폭한 주인이 예서제서 날뜁니다. (서울=연합뉴스, 고형규 기자, uni@yna.co.kr)
※ 이 글은 다음의 자료를 참고하여 작성했습니다.
1. E. H. 카 저 길현모 역, 『역사란 무엇인가』, 탐구당, 1987 (참고로 영문 초판 발간 연도는 1961년)
2.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온라인)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