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분투칼럼] 아프리카 스타트업, 이미 시장이 움직이고 있다

[※ 편집자 주 = 연합뉴스 글로벌문화교류단이 국내 주요대학 아프리카 연구기관 등과 손잡고 '우분투 칼럼'을 게재합니다. 우분투 칼럼에는 인류 고향이자 '기회의 땅'인 아프리카를 오랜 기간 연구해온 여러 교수와 전문가가 참여합니다. 아프리카를 다양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분석하는 우분투 칼럼에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기대합니다. 우분투는 '당신이 있어 내가 있다'는 뜻의 아프리카 반투어로, 공동체 정신과 인간애를 나타냅니다.]

케냐의 한 시골 보건소. 간호사가 작은 금속 상자의 자물쇠를 열고 내부 온도를 확인한다. 태양광으로 구동되는 이동식 냉장 박스 안에는 먼 도시에서 운반해 온 백신과 의약품이 담겨 있다. 전력망이 닿지 않는 오지에서도 콜드체인이 유지되는 것은 케냐 스타트업 드롭액세스(DropAccess)가 개발한 '백시박스'(VacciBox) 덕분이다. 마다가스카르와 말리의 186개 마을, 80만명에게 처음으로 전기를 공급한 위라잇 아프리카(WeLight Africa)도 아프리카에서 나왔다. 이들의 공통점은 단순하다. 문제가 있는 곳에서, 그 문제를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이 해법을 만들고 있다는 점이다.
아프리카 스타트업은 조용하지만 빠르게 세상을 바꾸고 있다. 이 변화는 더 이상 개발 협력의 언어로만 읽을 수 없다. 이제는 시장의 언어로도 읽어야 한다.
◇ 41억달러가 말하는 것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아프리카 스타트업 생태계는 '가능성'이라는 말 뒤에 숨어 있었다. 투자자들은 잠재력을 인정하면서도 신중했다. 그러나 그 조심스러운 시대는 지나가고 있다. 2025년 아프리카 테크 스타트업이 조달한 지분 투자와 부채성 금융의 총액은 전년 대비 25% 증가한 41억달러(약 6조1천500억원)였다. 2022년 이후 최대치다. 핀테크 중심이던 생태계는 클린테크, 헬스테크, 엔터프라이즈 소프트웨어로 확장됐다. 특히 클린테크와 기후·에너지 분야는 2025년 핵심 투자 영역으로 부상했다. 에너지 빈곤, 기후 리스크, 인프라 공백이라는 아프리카의 구조적 문제가 역설적으로 가장 강한 투자 동인이 되고 있다.
케냐의 오프그리드 태양광 기업 디라이트(d.light)는 매출채권 담보 대출한도를 3억달러(약 4천500억원) 규모로 확대했다. 이는 에너지 접근성 확대의 대표 사례로 주목받고 있다.
나이지리아 핀테크 머니포인트(Moniepoint)는 매월 수억 건의 거래를 처리하는 플랫폼으로 성장했다. 세네갈의 모바일 머니 기업 웨이브(Wave)는 프랑코폰 아프리카 금융 포용의 상징이 됐다. 중요한 것은 수치만이 아니다. 구조가 바뀌고 있다. 투자자들은 더 이상 화려한 성장 스토리만 보지 않는다. 수익성, 지속 가능성, 현지 문제 해결 능력을 함께 본다. 아프리카 스타트업 생태계가 '붐'의 단계를 넘어 '구조화'의 단계로 들어서고 있다는 뜻이다.
◇ 일본은 외교 플랫폼을 투자 플랫폼으로 바꿨다
이 변화를 가장 민감하게 포착한 나라 중 하나가 일본이다. 일본의 아프리카 전략은 아프리카개발회의(TICAD)라는 30년 된 외교 플랫폼 위에 서 있다. 처음에는 원조와 개발 협력이 중심이었다. 최근에는 이 플랫폼이 민간 투자와 스타트업 연계의 장으로 바뀌고 있다. 도요타자동차 그룹 산하의 도요타 쓰쇼(豊田通商)는 아프리카 전용 기업형 벤처캐피털인 모빌리티54(Mobility54)를 통해 물류, 모빌리티, 디지털 교통 분야 스타트업에 투자했다. 단순한 재무 투자가 아니다. 아프리카 54개국에 걸친 판매·유통망을 스타트업의 시장 진입 경로로 연결하는 전략적 투자다.
일본 경제산업성은 유엔개발계획(UNDP)과 함께 '일본 투자자를 만나자'(Meet the Toshikas) 프로그램을 통해 아프리카 스타트업과 일본 투자자를 연결하고 있다. 일본국제협력기구(JICA·자이카)도 민간 벤처펀드에 출자하며 공적개발원조(ODA)의 역할을 재정의하고 있다. 공적 개발기관이 직접 사업을 집행하는 것을 넘어, 민간 투자가 일어날 수 있는 정보와 신뢰의 환경을 조성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일본은 아프리카를 단순한 원조 대상이 아니라, 함께 시장을 만드는 파트너로 보기 시작했다.◇ 중국은 인프라와 플랫폼을 먼저 깔았다
중국의 접근은 더 깊다. 중국은 스타트업에 투자하기 전에 스타트업이 작동할 수 있는 인프라를 먼저 깔아 뒀다. 트랜션 홀딩스(Transsion Holdings)는 테크노(TECNO), 인피닉스(Infinix), 아이텔(itel) 등 브랜드를 통해 아프리카 스마트폰 시장에서 강한 지배력을 보였다. 그 위에 핀테크 앱과 디지털 서비스를 얹었다. 화웨이(Huawei)는 케냐와 에티오피아 등에서 통신·모바일 금융 인프라 구축에 깊이 관여하고 디지털 경제의 기반을 넓혀 왔다. 오페이(OPay)는 나이지리아 최대 비(非)은행 모바일 머니 플랫폼으로 성장했다. 하드웨어로 시장을 열고, 플랫폼으로 생태계를 만들고, 데이터로 미래를 선점하는 구조다. 아프리카 디지털 경제의 기반 상당 부분이 중국 기술과 자본 위에서 구축되고 있다.
◇ 우리는 어디쯤 와 있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쯤 와 있는가. 우리도 출발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은 일찍이 동아프리카 스타트업 생태계를 분석하며 에너지, 보건의료, 농업, 교육, 물류 분야의 시장 수요를 짚어냈다. 한·아프리카재단은 스타트업 경진대회와 글로벌 육성 사업을 통해 국내 스타트업이 아프리카 시장을 경험할 수 있는 공식적인 경로를 만들어 왔다. 한국국제교류단(KOICA)의 현지 네트워크와 혁신적 기술프로그램(CTS)도 민간 혁신 기술을 ODA 현장과 연결할 수 있는 중요한 자산이다. 연구, 네트워크, 현장 경험은 이미 어느 정도 축적돼 있다.
문제는 이것들이 아직 하나의 투자 생태계로 묶이지 못했다는 점이다. 대한민국의 대(對)아프리카 수출 비중은 여전히 낮고, 아프리카 스타트업에 특화된 민간 기업 주도의 벤처캐피탈(CVC)도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경쟁력을 가진 디지털 헬스, 에듀테크, 클린테크, 핀테크 인프라 분야에서 아프리카 스타트업과 실제로 손잡는 투자 메커니즘은 아직 미흡하다. 정부의 외교 행사, 연구 기관의 시장 분석, 재단의 네트워크, KOICA의 현지 경험, 민간 벤처 캐피탈(VC)과 대기업 CVC가 각자 따로 움직이면 속도는 느릴 수밖에 없다.
◇이제 필요한 것은 관심이 아니라 구조다
이제 필요한 것은 단순한 관심이 아니라 구조다. 일본이 TICAD를 민간 투자 플랫폼으로 전환했듯이, 우리도 한-아프리카 협력의 외교적 모멘텀을 민간 투자와 스타트업 연계로 이어가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시장 정보를 제공하는 연구 기관, 현지 파트너를 연결하는 재단, 개발 협력 현장을 가진 KOICA, 투자 판단을 할 수 있는 민간 자본이 하나의 생태계 안에서 움직여야 한다. 아프리카 진출을 '사업 하나'가 아니라 '시장 형성 과정'으로 봐야 한다.
아프리카 스타트업의 힘은 문제를 발견하는 눈과 그것을 해결하려는 의지에서 나온다. 전기가 없는 마을은 에너지 기업의 시장이 되고, 병원이 멀리 있는 농촌은 디지털 헬스의 현장이 되며, 은행 계좌가 없는 사람들은 모바일 금융의 고객이 된다. 아프리카는 더 이상 지원을 기다리는 대륙이 아니다. 함께 문제를 풀고, 함께 시장을 만들 파트너를 찾고 있다.
일본과 중국은 이미 그 흐름 속에 들어와 있다. 투자로, 기술로, 플랫폼으로 각각 자리를 잡고 있다. 우리도 이제 늦지 않게 들어가야 한다. 아프리카 스타트업은 원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함께 성장할 파트너를 찾고 있다. 문제가 있는 곳에 시장이 있다. 아프리카에는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다. 그리고 그것은 기회의 다른 이름이다.
※ 외부 필진 기고는 연합뉴스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최두영 박사
현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원 아시아·아프리카개발협력센터 연구위원,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지역대학원 겸임교수, 국제개발협력학회 아프리카위원장, 한국외국어대 국제지역대학원 경제학 박사. 주에티오피아 대사관 전문직 행정원 역임, '아프리카 비즈니스 환경과 시장 진출 전략', '동아프리카 스타트업 시장분석' 등 아프리카 경제 및 디지털 전환에 관한 다수 논문과 보고서 집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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