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시선] 중국이 말하는 '안정'…그 속에 담긴 자신감

(베이징=연합뉴스) 한종구 특파원 = 최근 중국 외교부가 미중 관계를 언급할 때 유난히 자주 사용하는 표현이 있다.
중국어로 '안정'을 뜻하는 '원딩'(穩定·온정)이다.
최근 2주간 진행된 10차례의 외교부 브리핑에서 이 단어는 모두 30번 거론됐다. 하루 평균 3번씩 언급한 셈이다.
중국은 미국의 추가 관세와 첨단기술 규제에 강하게 반발한다. 대만 문제를 둘러싼 신경전도 계속된다.
그런데도 중국은 매번 '대화와 협상', '안정적 관계'를 강조한다.
겉으로 보면 모순처럼 보이는 이 모습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지난달 미중 정상회담에서 제시한 '건설적 전략 안정 관계'(建設性戰略穩定關係·Constructive relationship of strategic stability)라는 표현 속에 압축돼 있다.
외교적 수사처럼 들리지만, 이 안에는 현재 미중 관계와 국제질서에 대한 중국의 인식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이 관계는 단순히 갈등 봉합용 표현이 아니라 미중 전략 경쟁의 새로운 틀을 제안한 개념에 가깝다.
중국 관영 매체들은 이를 적극적 협력, 절제된 경쟁, 통제 가능한 이견, 지속 가능한 평화라는 네 가지 키워드로 설명한다.
강준영 한국외국어대 교수는 이를 두고 싸움은 하되 파국은 피하자는 의미의 4자성어 '투이불파'(鬪而不破)로 설명했다.
이는 중국이 오래전부터 미국에 던진 메시지의 연장선에 있다.
시 주석은 2013년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의 회담에서 "태평양은 중국과 미국 두 대국을 수용할 수 있다"는 말로 미국 주도 세계 질서에 대한 도전을 숨기지 않았다.
중국의 부상을 인정해 달라는 요구였다. 하지만 당시 미국은 이 구상에 응하지 않았다.
중국을 인정하는 순간 미국 중심 국제질서의 구조 변화까지 받아들여야 한다는 부담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후 미중 관계는 무역전쟁, 첨단기술 패권 경쟁, 대만 문제를 거치며 오히려 더 격렬한 충돌 국면으로 치달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중국이 한층 진화된 형태의 같은 메시지를 다시 들고나왔다.
시 주석이 언급한 '투키디데스의 함정'이 상징적이다.
중국은 오랫동안 이 개념을 '미국이 중국의 부상을 지나치게 경계한다'는 논리를 설명하는 데 활용해왔다.
양국이 충돌의 함정에 빠져선 안 되며 협력을 통해 세계 안정에 기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이면에는 중국이 이미 미국과 대등한 수준의 전략적 행위자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
중국 관영 매체들이 이번 회담을 두고 "세계에 강력한 긍정 신호를 보냈다", "중미 관계라는 큰 배의 키를 잘 잡았다"고 평가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베이징에서 만난 중국 전문가들은 "중국이 원하는 것은 미국과의 화해가 아니라 미국의 인정"이라고 말한다.
중국은 이번 회담을 통해 단순히 미국과의 관계를 안정시키는 데 그치지 않고, 국제사회에 '미국과 중국이 함께 세계 질서를 움직이는 시대'라는 상징을 보여주려 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군사력과 금융, 동맹 체계, 첨단기술 경쟁력 등에서 미국의 우위는 여전히 뚜렷하다.
하지만 중국 역시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했고, 국제질서는 미국 단독 주도 체제와 미중 경쟁 체제 사이 어딘가로 이동하고 있다.
중국은 이번 정상회담을 통해 바로 그 변화를 상징적으로 확인받고 싶어 했던 것으로 보인다.

흥미로운 점은 미중 모두 지금 당장 충돌을 감당할 여력이 크지 않다는 사실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하락한 지지율과 물가 부담 속에서 오는 11월 중간선거를 준비해야 한다.
시 주석 역시 부동산 침체와 내수 부진, 청년 실업 문제 속에서 경제 안정이 절실하다.
양국 모두 '강한 충돌'보다 '관리된 경쟁'을 필요로 하는 상황이다.
결국 건설적 전략 안정 관계란 양국이 앞으로도 치열하게 경쟁하되 세계 경제와 안보 질서를 무너뜨릴 정도의 충돌은 피하자는 일종의 현실적 타협에 가깝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중국의 달라진 자신감이 자리 잡고 있다.
실제로 미중 정상회담은 공동성명도, 극적인 합의도 없었다.
대만 문제, 첨단기술, 공급망, 군사안보 같은 핵심 현안에서 양국의 입장차는 여전히 컸다.
미국은 보잉 항공기 판매와 대두 수출 등 경제적 실익 확보에 집중했지만, 중국은 보다 큰 외교·전략 담론을 제시하며 '미국과 중국이 세계 질서를 함께 관리하는 관계'라는 이미지를 각인시키는 데 더 주력했다.
중국은 더 이상 자신을 국제질서의 참여자가 아니라 미국과 함께 질서를 설계하고 관리할 수 있는 행위자로 규정하고 있다.
건설적 전략 안정 관계라는 다소 낯선 표현에는 바로 중국의 달라진 자신감이 담겨 있다.
jkha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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