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포의 창] 다카하라·유라·박승의…세 개의 이름에 국적도 6번 바뀌다

(파주=연합뉴스) 강성철 기자 = "2차대전 패망 후 일본은 사할린에 강제 징용된 조선인들을 내팽개치듯 외면했습니다. 냉전 시대에 남겨진 한인들은 조국과 자유 왕래는 고사하고 서신 왕래도 못 하며 50여년간 일가친척과의 상봉을 그리다 일부는 차디찬 사할린 땅속에 묻혔죠. 이 비극이 이제는 끝나나 싶었는데 영주귀국의 제한으로 후손들과 이산의 아픔을 겪고 있으니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소재 문산도서관에서는 '세 개의 이름, 하나의 삶'이라는 제목의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사할린에서 영주귀국해 파주에 정착한 파주사할린영주귀국자협회의 박승의(84) 회장의 생애 기록과 개인 소장 자료를 통해 사할린에서의 삶과 영주귀국 이후의 시간을 조명하는 전시다.
박 회장은 7일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디아스포라의 삶을 사는 사할린 한인의 이산은 아직도 진행형"이라며 "모국이 이들을 적극적으로 포용하는 정책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사할린 동포는 일제강점기 강제 동원돼 고통을 겪었고 1945년 해방 이후에도 냉전체제가 지속해 잊힌 존재로 살다가 1991년 러시아와 수교로 인해 한국 방문길이 열렸다.
고국을 그리워하던 동포 1세들은 한일 양국 적십자의 도움으로 영주귀국 길에 올랐으나, 1945년 8월 15일 이전 출생자로 제한돼 자손과 떨어져 살아야 하는 이산의 아픔이 이어졌다.
국회는 2020년 특별법을 마련했으나 영주귀국 대상자를 본인 외에 배우자 또는 동반 가족(직계비속) 1명과 그 배우자로 확대하는 데 그쳤고, 2024년에 추가 개정을 통해 자녀와 배우자 전체로 확대했다.
문제는 사망으로 자녀가 없는 경우 직계비속(손자) 1명과 배우자로 제한한 점이다.
사할린 한인 사회는 4세대를 넘어 5세대까지 나오고 있어서 2세의 경우도 대부분 환갑을 넘은 지가 오래다. 영주귀국하려면 손주 등 후손들과 생이별해야 하는 상황이라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다.

1942년 사할린에서 출생한 박 회장은 일본의 2차대전 패망 전까지 다카하시 가쯔요시로 불렸고, 소련의 남사할린 점령 후 보꾸 다카하라 유리라는 소련식 이름을 계속 써오다가 2009년 영주귀국해 대한민국 국적을 회복하면서 본래 부모가 지어준 '박승의'라는 이름을 되찾았다.
그의 국적은 이름보다 더 파란만장하다. 일제강점기 일본인이었다가 전후 소련시대에 무국적자로 지냈다. 당시 대부분 전라도·경상도에서 강제징용 돼 사할린에 남겨졌던 한인들은 언젠가 귀국하기 위해서 무국적자로서 각종 차별을 받으면서도 소련 공민증을 취득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북한 공관이 들어오면서 김일성대학 입학 등 배움의 길을 터준다는 설득과 남한과 조금이라도 가까운 곳으로 가려는 마음에 북한 국적을 취득했으나 북한에 갔다가 탈출한 이들을 통해 통제된 독재국가라는 사실을 알고 유학을 포기했다.
이후 소련 국적을 취득했다가 다시 러시아 국적으로 바뀌었고, 2009년 영주귀국 후 한국인이 됐다.
박 회장은 "아버지는 1977년 돌아가시기 전까지 전북 무주의 고향을 그리워했고, 기회가 되면 꼭 고국에 가라고 유언을 남기셨다"며 "영주귀국해 국적을 찾는 일은 아버지의 염원을 이뤄드리면서 동시에 내 정체성을 확립하는 일이라서 무척 감격스러웠다"고 술회했다.
그의 가족사는 마치 한국 근현대사의 비극과 닮았다. 그의 고모는 일제강점기 시골서 돈 벌러 대처로 나갔다가 행방불명된 남편으로 인해 시부모와 자녀 등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당시 일본에 취업하면 돈을 더 벌 수 있다는 말에 자녀 중 하나만 데리고 일본행을 택했다.
그러나 이는 취업 사기로 그가 배에서 내린 곳은 사할린 남쪽 항구였고, 당시 징용돼 사할린에서 일하던 한인 노총각에게 강제로 시집을 가게 됐다.
박 회장의 아버지는 누이를 찾아 10대에 사할린에 갔다가 다시 돌아와 장가를 갔으나 1939년 강제징용으로 사할린에 다시 끌려왔고, 몇 달 후 어머니는 어쩔 수 없이 남편을 따라 건너왔는데 그게 고향과의 영영 이별이 됐다.
2차대전 패전 후 최남단 항구인 코르사코프에서 조선으로 돌아가는 배를 타려고 그도 부모의 손을 잡고 왔느나 모든 배는 일본인만을 태웠고, 결국 다시 거처로 돌아와야 했다.
그는 "고국에서 우리를 태워 갈 배를 기다리다 지치고 절망해 바닷가로 뛰어들어 자살한 이들도 있었고, 소련 치하에서 무국적자이다 보니 제대로 된 취업도 못 했고, 모스크바국립대 진학을 꿈꿨지만 거절당하는 등 어려움이 숱하게 많았다"고 돌아봤다.
박 회장은 사할린국립사범대를 나와서 중학교 물리·수학 교사를 하다가 건강으로 스트레스가 적은 전자제품 수리기사로 20여년 지냈다.
1988년 서울올림픽으로 한국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사할린에 우리말을 배우려는 이들이 늘자 한글학교 교사를 시작했고, 1992년 친척의 도움으로 연세대 한국어학당 유학 후 1993년부터 영주귀국하기 전까지 사할린국립사범대 동양학부의 한국어 교수를 역임했다.
사할린에는 현재 3만여 명의 한인이 살고 있다. 동포 1세는 500여 명, 2세는 5천여 명, 부모가 생존한 2세는 1천500여 명으로 추산된다.
박 회장은 "이들 중 일부는 스탈린의 강제이주로 중앙아시아로 이주했다가 돌아온 고려인과 1946∼1950년 벌목공 등으로 사할린에 파견해 왔다가 잔류한 북한 출신도 있다"며 "이들 모두 세월이 흘러 하나의 사할린 한인 공동체를 이루며 산다"고 설명했다.
한때 무국적자로 텃밭에서 채소를 키워 내다 팔며 생계를 잇고 자식 교육을 열심히 했던 1세대의 헌신 덕분에 한인들은 사할린에서 우수한 지역 공동체로 부상했다.
박 회장은 "근면 성실함으로 널리 알려진 사할린 한인들은 남사할린의 무역과 경제를 장악할 정도"라며 "사할린 최초의 5성급 호텔을 비롯해 건축·어업·산업의 주요 기업을 한인이 소유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가족사와 사할린 한인의 삶을 기록한 '박승의 나는 누구입니까'를 저술하기도 한 그는 여생을 사할린 한인사와 차세대의 정체성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박 회장은 "한인이라는 정체성이 강한 1∼2세대와 달리 3세대부터는 연결고리가 약해지고 있고 4세대 이후는 러시아인이라는 의식이 커지고 있어 이대로라면 한인사회가 사라지고 말 것"이라며 "사할린 한인사를 복원하고 차세대에 정체성을 키우는 일은 궁극적으로 모국과 사할린 또는 러시아 간 가교가 튼튼해지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wakaru@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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