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집자 주 = 한국국제교류재단(KF)의 지난해 발표에 따르면 세계 한류팬은 약 2억2천500만명에 육박한다고 합니다. 또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초월해 지구 반대편과 동시에 소통하는 '디지털 실크로드' 시대도 열리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한류 4.0'의 시대입니다. 연합뉴스 동포·다문화부 K컬처팀은 독자 여러분께 새로운 시선으로 한국 문화를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되고자 전문가 칼럼 시리즈를 준비했습니다. 시리즈는 매주 게재하며 영문 한류 뉴스 사이트 K바이브에서도 영문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네덜란드에는 델프트라는 아름다운 소도시가 있다. 유럽의 다른 역사 도시와 마찬가지로 이곳에도 도시의 중심에 성당과 시청으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광장이 있었다. 이 광장이 1970년에 이미 자동차로 가득 차서 마치 공용주차장처럼 돼버렸고 따라서 그 광장의 광장다움을 찾아볼 수가 없게 됐다. 시 당국과 시민이 이 자동차 공해를 어찌해야 할는지 의논한 끝에 델프트 공과대학에 그 해결 방안을 마련해 달라고 의뢰했다. 얼마 후 제안된 공과대학의 아이디어는 '차 없는 거리, 보행자 천국'이었는데 이 아이디어는 로테르담의 전후 복구 사업에서 중심시설이었던 라인바안(Lijnbaan) 지역의 아이디어에서 온 것이다. 다만 주변의 상인과 주민들의 입장을 고려해 3개월간 시험적으로 시행을 해보되 마땅치가 않으면 그 방안을 철회하겠다는 것이었는데 시 당국과 시민들 사이에 그렇게 약속이 이뤄졌다. 그리고 3개월의 시험 기간 중에 많은 사람이 소음과 매연 없고 차가 성당과 광장의 전망을 가리지 않고, 걸어 다니기에 편해지게 됐다. 차 없는 거리를 천천히 걸어 다니게 되면서 상점과 식당에 눈길을 주게 되고 가게에 더 들어오게 됐고 조용히 식사할 분위기가 조성된 것을 알게 됐다. 나중에는 옥외카페가 생겨나고 주말에는 광장에 축제가 열리고 옛날처럼 벼룩시장이 벌어졌다. 주변 식당과 상가의 상인들은 매상이 월등하게 오르는 것을 체감하고 차량 통행금지를 적극 지지하게 됐다. 당시에, 그곳에서 이런 과정을 지켜보면서 필자는 시 당국과 시민과 현지 대학의 긴밀한 협의, 이해, 그리고 그들 도시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에 깊이 감동했다. 그리고 아마도 이 사건은 이후 유럽의 모든 중·대도시에서 차 없는 거리와 자동차 불이익 정책의 시발이 됐던 것으로 기억한다. 훗날 인사동을 차 없는 거리로 만들자는 논의가 있었을 때 그 같은 방법을 제안해 보았지만, 서울시에서 받아들이지를 않았다. 여의도 계획과 세운상가 계획은 필자가 네덜란드로 떠나기 직전 김수근 연구소에 근무하던 동안에 진행된 미증유의 대규모 도시 프로젝트들이었다. 내가 거기에 참여하는 동안 델프트의 경험을 먼저 겪었더라면 어떠했을까를 지금도 가끔 돌이켜 생각해 본다. 당시의 그 프로젝트들은 한마디로 박정희 대통령-김현옥 서울시장- 나의 스승 김수근 선생 라인에서 결정이 돼 상명하달식으로 내려오는 지침에 따라 계획되고 설계됐기에 사실상 시민의 입장에서 무엇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따져볼 겨를이 없었다. 나는 그런 결과 때문에 오늘날 세운상가가 푸대접받아 철거되고 그보다 더한 괴물이 대신 들어서는 악순환의 고리를 지금까지 연장하고 있는 거라고 믿고 있다. 우리는 자칫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가 시민을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고 지낸다. 마치 대통령을 하고 싶은 정치인이 경력을 쌓기 위해 전시행정을 펼치는 시험대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어느 도시에나 인간의 부재, 인간성의 부재, 그리고 도시의 편의시설도 부재한 채, 도시의 질서를 위해 시민이 희생하고 복종해야 하는 현상이 광범하게 벌어진다. 그뿐만 아니라 이것은 나아가 민의를 가장한 정치권력의 시민에 대한 폭력으로 비화하는 것이다. 도시에서 개인은 개인의 자유와 인권을 보장받기가 힘이 든다. 그런데 내게도 수십 년 넘은 꿈이 있다. 서울의 사대문 안을 몽땅 차 없는 거리로 만드는 꿈이다. 뜬금없는 이야기가 아니다. 동대문에서 서대문까지는 4.2km에 불과하다. 지하철이 잘 깔려 있으니 그것만 타고 다녀도 별로 걸을 일이 없고, 그러니 사람들이 기껏 걸어봐야 2km 이상 걸을 일도 없다. 나는 이제 그런 짓을 안 하지만 헬스클럽의 러닝머신에서 30분을 걷는 것이 3㎞ 거리 정도라고 한다. 요즘처럼 모든 사람이 건강을 위해 어느 곳에서나 걷기가 유행인 시절에는 더욱이 '구도심의 차 없는 거리'는 가능하다고 본다. 물론 소방차, 경찰차, 구급차, 쓰레기차는 필요할 때만 달리고, 종로 거리를 양측 1차선씩만 남기고 녹지로, 자전거 도로로, 보행자도로로, 바뀐 상황을 상상만 해도 나는 가슴이 뛴다. 더 욕심을 부린다면 사대문 안에는 고층빌딩을 지양하고 전체 5층 미만으로만 지어서 어느 곳에서나 북악산, 남산, 인왕산, 낙산 중 어느 하나는 보이도록 했으면 한다. 서울의 산처럼 아름다운 산은 세계 어느 도시에도 없을 뿐 아니라 이런 거대한 현대 도시가 평지 아닌 산악지형 속에 놓여 있다는 사실은 결코 저버릴 수 없는 도시의 귀중한 자산이기 때문이다. 사실 사대문 안에는 5대 궁이 들어서 있어 고층화, 고밀화는 적합지가 않을 뿐 아니라 사실은 저층화하면서 자동차 없이 넓은 녹지를 걸어 다니는 고전적, 자연적인 느림의 도시가 맞다. 그래야 사실상 땅의 부가가치도 더 올라가고 세계인의 존경을 받는 인간적인 도시가 될 것이다. 김원 건축가
▲ 독립기념관·코엑스·태백산맥기념관·국립국악당·통일연수원·남양주종합촬영소 등 설계. ▲ 문화재청(현 국가유산청) 문화재위원, 삼성문화재단 이사, 서울환경영화제 조직위원장 등 역임. ▲ 한국인권재단 후원회장 역임. ▲ 서울생태문화포럼 공동대표. ▲ 광화문시민위원회 위원장.
* 더 자세한 내용은 김원 건축가의 저서 '행복을 그리는 건축가', '꿈을 그리는 건축가', '못다 그린 건축가'를 통해 보실 수 있습니다.
<정리 : 이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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