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도 중시하는 문명이 인간성까지 변화시켜…대면 접촉 중요성 강조

(서울=연합뉴스) 이세원 기자 = 1990년대 중반에는 친구 집 전화번호를 외우는 사람이 꽤 있었다. 운전자는 지도를 참고해 고속도로를 달렸고 주유소에 들러 자연스럽게 길을 묻곤 했다. 휴대전화가 일반화되자 일부러 노력하지 않으면 전화번호를 외울 수 없게 됐다. 내비게이션과 우버 시스템이 보급되면서 택시 기사도 길눈이 어두워졌다. 편리함을 포기하고 예전 방식으로 돌아가기에는 허들이 높다. 정보기술(IT)을 거부할 이유를 딱히 찾기도 어렵다.
미국기업연구소 선임연구원인 크리스틴 로젠은 최근 번역 출간된 '경험의 멸종'(어크로스출판그룹)에서 기술을 통해 간접 체험하는 '매개 경험'에 의존하도록 인간을 길들이는 디지털 문명을 비판적으로 들여다본다.
기술은 시공간을 초월하게 해줬다. 지구 반대편 길거리를 살펴보는 것은 물론이고 흡연하면 10년 후 얼마나 늙는지 가상 체험을 하는 것처럼 실제 해본 적 없는 일을 느껴보는 '베자 듀'도 가능하게 해 준다. 사람들은 직접 체험 대신 타인의 경험을 소비하는데 많은 시간을 쓰게 됐다. 요리 프로그램을 즐겨 보지만 정작 먹을 때는 공장에서 출시된 간편식을 선호하고, 친구와 대화하는 대신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업데이트한다.

매개 경험은 부작용을 낳는다. 책은 2010년 한국의 한 부부가 온라인 게임 프리우스에서 가상 아이를 키우느라 실제 아이를 굶어 죽게 내버려 둔 사건을 소개한다. 일본에서는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의 애니메이션 캐릭터와 '결혼'하는 남성이 2009년에 이미 등장했다. 인간관계를 SNS로 대체하면서 예의범절, 인내, 눈 맞춤과 같은 사회적 기술은 점점 약해지고 있다. 현대인은 시간과 공간이 지닌 물리적 한계를 참지 못하게 됐다. 디지털로 변환이 가능하기만 하다면 콘서트, 성관계, 종교적 헌신과 같은 즐거운 경험조차 '빨리 감기'를 할 수 있게 됐다고 책은 꼬집는다.
인간은 서로를 보며 소통하도록 설계됐다. 표정, 자세, 몸짓을 읽을 수 있게 진화한 것이다. 강렬한 눈맞춤은 심박수를 높이고, 중추신경계에서 신경전달 물질이 분비되게 하며, 기분과 스트레스 조절에 관여하는 유기 화합물 페닐에틸아민의 분비도 촉진한다. 대면 소통은 상대방의 비언어적 신호를 더 잘 감지하는 방법이며 공감 능력과도 직결된다. 하지만 대면 상호작용을 주기적으로 하지 않으면 이런 생물학적 능력도 결국에는 사라진다고 책은 우려한다.

편리함의 대가에도 책은 주목한다. 과거에는 마음에 드는 식당을 찾기 위해 발품을 팔았지만, 이런 노력은 구글 알고리즘으로 대체됐다. 하지만 비즈니스 모델에 맞지 않는 선택지들은 배제된다. 사람들은 24시간 연결돼 있지만 사회적 고립은 심화하고 있다. 미국 시카고대 국립여론조사센터(NORC)가 실시하는 종합사회조사(GSS)에 따르면 2004년에 '중요한 문제'를 논의할 상대가 없다고 답한 이들은 1985년의 3배에 달했으며 이런 경향은 근래에 더 심화했다.
팬데믹은 매개 경험을 확대했다. 직장인들은 코로나19 봉쇄가 끝난 후 사무실로 출근하라는 요구에 불만을 드러냈다. 하지만 사무실 구석에서 나누는 비공식적인 대화와 우연한 대면 접촉이 생산성을 향상한다는 강력한 증거가 연구에서 확인됐으며, 물리적 근접성은 연구의 성과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키보드로 문자를 입력하는 것보다 손으로 글씨를 쓰는 편이 기억에 도움이 된다 것을 시사하는 연구 결과도 꽤 있다. 그렇지만 현대인은 손으로 거의 글을 쓰지 않으며 미국 학교는 필기체 교육에서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기술은 인간의 참을성에도 영향을 미친다. 일상의 속도가 빨라지면서 사람들은 즉각적인 연락 욕구를 억제하기 어려워졌고 위험을 무릅쓰고 운전 중에 휴대전화를 사용한다. 연구에 따르면 한 사이트의 작동 속도가 경쟁 사이트보다 0.25초만 느려도 사람들의 방문 빈도가 떨어진다고 한다. 2019년 미국 뉴욕 지하철에서 78세 여성을 공격한 한 남성이 기소됐는데 그가 여성을 맹렬하게 걷어차는 동안 그 장면을 녹화하고 소리를 지르는 사람은 있었으나 개입한 사람은 없었다. 기술이 사람들의 연대 의식이나 사회적 의무감까지 바꾸고 있다는 것이다.
책은 "기술을 완전히 거부할 필요는 없다"면서도 "온라인에서 하루 종일 웃고 사랑하며 살아갈 사람들의 육체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명확하게 언급하지 않는 기술 자본 종사자들의 태도에 의문을 제기한다. 기술이 인간의 확장이어야 하는지 아니면 인간을 대체해야 하는지에 관해 사례를 바탕으로 생생한 질문을 던진다.

책은 현대인이 매개 기술에 젖어 들면서 잃어버렸거나 상실하고 있는 사고 능력과 존재의 방식을 되찾도록 독자를 독려한다. X세대인 저자는 자신이 어른이 되어서야 현대 사회를 지배하는 새로운 기술을 접했기 때문에 신기술이 제공하는 전망과 위험성을 동시에 인식할 수 있었다면서 새로운 기기와 앱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말라고 권한다.
이영래 옮김. 364쪽.
sewonle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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