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선종] "가난한 자를 위한 교회"…큰 울림 남긴 '4박5일 방한'
연합뉴스
입력 2025-04-21 17:31:22 수정 2025-04-21 19:33:44
방탄차 대신 1천600㏄급 쏘울·낡은 구두와 가방…검소·소탈 행보 '눈길'
세월호 유족·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장애인에 손길…초기 순교자 124위 시복
평화·위로·화해의 메시지…요한 바오로 2세에 이은 세 번째 방문


환한 미소로 화답하는 프란치스코 교황(당진 사진공동취재단=연합뉴스) 프란치스코 교황이 2014년 8월 15일 오후 충남 당진 솔뫼성지를 찾아 방명록에 메시지를 남긴 뒤 인자한 미소로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 [자료사진]

(서울=연합뉴스) 이세원 기자 = 21일(현지시간) 선종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즉위 이듬해인 2014년 여름 한국을 방문해 큰 울림을 남겼다.

1989년 10월 요한 바오로 2세의 두 번째 방한 후 약 25년 만인 2014년 8월 14∼18일 4박 5일간 한국을 찾은 프란치스코 교황은 평화·위로·화해의 메시지를 전했다.

시민들과 인사 나누는 프란치스코 교황(서울 사진공동취재단=연합뉴스) 2014년 8월 16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시복식 미사가 열리는 광화문 광장 주변을 차량으로 돌며 인사하고 있다. [자료사진]

당시 방한은 윤지충 바오로 등 순교자 124위를 천주교 복자로 선포하는 시복미사 집전과 아시아청년대회 참석을 위한 것이었다. 교황은 한국에 머무는 4박 5일간 세월호 희생자 유가족,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장애인 등 고통받는 이들을 보듬는 행보로 일관해 종교의 벽을 넘어선 반향을 일으켰다. 한국 주교들을 향해 타성에 젖지 말라고 경고했으며 물질주의의 유혹을 경계하라고 당부했다. 분단된 한반도의 평화도 염원했다.

◇ 의전차량은 방탄차 대신 1천600㏄급 쏘울…헬기 대신 KTX 타기도

무엇보다 검소하고 소탈한 모습이 온 국민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의전차량('포프모빌')으로 이용한 것은 고급 방탄차가 아닌 기아자동차의 1천600㏄급 준중형 박스카 '쏘울'이었다. 그는 방한 내내 교황의 상징인 금제 십자가 목걸이 대신 20년간 착용한 철제 십자가 목걸이를 했다. 낡은 검은색 구두를 신었고 이동 중에는 오래된 가죽 가방을 직접 들었다.

쏘울 탄 프란치스코 교황(서울=연합뉴스) 임헌정 기자 =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황이 2014년 8월 14일 서울 중구 을지로입구 교차로에서 궁정동 교황청대사관으로 향하며 시민들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하고 있다. [자료사진]

교황은 서울에서 대전으로 갈 때 원래는 헬기를 타기로 돼 있었지만 KTX를 이용했다. KTX는 기상 상황 등으로 헬기를 이용하지 못하는 경우의 대안이었다. 이날 서울, 대전 일대 날씨가 맑지 않았던 것이 영향을 미쳤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전체 18량의 객차 중 4호 특실 객차를 이용했으며, 경호를 위해 교황이 탄 특실과 연결된 다른 특실 3개 객차에는 승객이 타지 않았다. 하지만 나머지 객실 14량에는 일반인 500여명이 탑승해 교황과 함께 대전으로 이동하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고속철도를 이용한 첫 사례로 기록됐다. 교황의 객실 서비스를 담당한 승무원은 "필요한 물건을 가져다드릴 때마다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고마워하셔서 감격스러웠다"고 말했다.

어린이 이마에 입 맞추는 프란치스코 교황(서울 사진공동취재단=연합뉴스) 프란치스코 교황이 2014년 8월 16일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시복미사'가 열린 서울 광화문 광장에 무개차를 타고 입장하며 어린이의 머리에 입을 맞추고 있다. [자료사진]

열차에서 내린 프란치스코 교황은 환호하며 손뼉을 치는 시민들에게 미소를 지으며 손을 들어 화답했고 아빠의 목말을 탄 여자아이 머리 위에 손을 얹으며 축복했다. 이후 이동하는 도중 여덟 차례나 퍼레이드용 차량을 멈추게 하고 아이들의 얼굴을 쓰다듬거나 이마와 볼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강복을 기원했다.

◇ 세월호 유족 위로한 교황…"인간의 고통 앞에 중립 불가"

프란치스코 교황은 성남 서울공항 도착 직후, 마중 나온 세월호 참사 희생자 유족 4명의 손을 잡고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고 있다. 가슴이 아프다. 희생자들을 기억하고 있다"고 말하며 위로했다. 300명이 넘는 사망·실종자가 발생한 국가적 참사로 비탄에 빠진 국민을 향한 다독임이기도 했다.

세월호 유가족과 인사하는 프란치스코 교황(성남=연합뉴스) 도광환 기자 = 2014년 8월 14일 오전 서울공항에 도착한 프란치스코 교황이 환영나온 인사들 중 세월호 유가족 대표들과 인사하고 있다. [자료사진]

광복절에 대전월드컵경기장에서 성모승천대축일 미사를 집전할 때는 세월호 유가족으로부터 직전에 받은 노란 리본 모양의 배지를 왼쪽 가슴에 달고 있었다. 교황은 삼종기도를 올리면서 "생명을 잃은 모든 이들과 이 국가적 대재난으로 인하여 여전히 고통받고 있는 이들을 성모님께 의탁한다"고 세월호 참사에 관해 언급했다. 그는 참사를 겪으며 한국 사람들이 슬픔 속에 하나가 됐다고 비유하고서 "공동선을 위해 연대하고 협력하는 그들의 헌신적인 모습을 확인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방한을 마치고 바티칸으로 돌아가는 전세기 안에서도 배지는 그대로 있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배지를 달고 반나절쯤 지나자 어떤 사람이 '중립을 지켜야 하니 그것을 떼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말했다고 소개하면서 "인간적 고통 앞에서 중립을 지킬 수는 없다"고 계속 달고 있었던 이유를 설명했다.

세월호 희생자 추모 리본 단 프란치스코 교황(서산 사진공동취재단=연합뉴스) 2014년 8월 17일 오전 프란치스코 교황이 아시아 주교들과의 만남을 가지기 위해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성지를 방문하고 있다. 이날 프란치스코 교황은 가슴에 세월호 희생자 추모 리본 모양 배치를 착용했고 손에는 오래된 가방을 직접 들었다. [자료사진]

그는 세월호 참사로 목숨을 잃은 단원고 학생 이승현 군의 아버지 이호진 씨에게 이례적으로 단독 세례를 베풀기도 했다. 이씨의 세례명은 공식 교황명과 같은 프란치스코여서 더 주목받았다.

◇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등 약자·소외층에 손 내밀어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용수 할머니를 비롯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제주 강정마을 주민, 밀양 송전탑 건설 예정지역 주민, 용산 참사 피해자, 북한이탈주민과 납북자 가족 등 사회적 약자나 소외 계층을 초청한 가운데 서울 명동대성당에서 '평화와 화해를 위한 미사'를 집전했다.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 위로하는 교황(서울=연합뉴스) 도광환 기자 = 프란치스코 교황이 2014년 8월 18일 오전 서울 명동성당에서 열린 ‘평화와 화해를 위한 미사에 참석,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을 위로하던 중 김복동 할머니로부터 나비 뱃지를 선물받고 있다. [자료사진]

그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복동 할머니로부터 선물 받은 위안부 피해자를 상징하는 '희망 나비' 배지를 착용했으며 이용수 할머니에게는 묵주를 선물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미사에 초청된 약자나 소외 계층에게 다가가 인사를 나누고 제단에 올랐으며, 퇴장하면서도 위안부 할머니와 장애인 등의 손을 잡고 머리에 손을 얹어 축복을 빌었다.

교황은 귀국길 전세기 기자회견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해 "이분들은 이용당했고 노예가 됐고 그것은 잔혹한 일이었다"며 "그들은 고통을 겪었음에도 인간적인 품위를 지니고 있었다"고 이야기했다.

음성 꽃동네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EPA=연합뉴스) 2014년 8월 16일 충북 음성군 소재 꽃동네를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이 제스처를 하고 있다. [자료사진]

충북 음성군 꽃동네를 찾아갔을 때는 의자에 앉으라는 꽃동네 측의 거듭된 권유에도 장애인들과 함께하는 50여분 내내 서 있었다. 당시 78세였던 프란치스코 교황은 빡빡한 일정에 체력적인 부담을 느낄 만했지만 장애인 한명 한명에게 인자하고 따뜻한 눈길을 보내며 소통하려고 애썼다. 율동 공연을 준비한 장애 아동들에게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거나 이들을 꼭 껴안아 주기도 했다.

◇ "부자 위한 교회 안 돼" 한국 주교들에 일침…물질주의에 경종

프란치스코 교황은 교회가 부유한 자들의 이익에 영합하지 말고 가난하고 약한 자들을 돌봐야 한다며 한국 천주교 지도자들에게 일침을 놓았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를 찾아가서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가 아니라 부자들을 위한 부유한 교회, 또는 잘사는 자들을 위한 중산층의 교회가 되려는 유혹"을 경계하라며 "가난한 이들이 복음의 중심에 있다"고 강조했다.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서울 EPA=연합뉴스) 2014년 8월 14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서울 광진구 소재 한국천주교주교회의를 방문해 주교들을 만나고 있다. [자료사진]

교황은 또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을 사업적인 차원으로만 축소하고, 모든 사람이 반드시 한 인간으로서 성장하고 자신의 인격과 창의력과 문화를 존엄하게 표현하여야 할 필요성을 잊어버리는 위험에 빠질 수 있다"고 우려를 표명했다.

그는 "번영의 시기에 오는 위험, 유혹이 있다. 위험이란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한갓 '사교 모임'이 되는 것"이라며 "'번영의 신학'에 이르렀다고 말하지는 않겠지만 그저 그런 안일한 교회는 되지 않도록 하라"고 당부했다.

꽃동네에서는 평신도 사도직 지도자들에게 "가난한 이들과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다가서는 일에 직접 참여하는 여러 단체의 활동을 높이 치하한다"면서도 "이런 활동은 자선 사업에 국한되지 않고 인간 성장을 위한 구체적인 노력으로 확대되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미소(서울=연합뉴스) 임헌정 기자 =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황이 2014년 8월 14일 청와대로 향하며 분수대 앞 환영 나온 시민들에게 손을 흔들며 밝게 웃고 있다. [자료사진]

교황은 무한 경쟁과 물질주의의 함정을 경계하라고도 일깨웠다. 대전에서 열린 성모승천대축일 미사에서 "올바른 정신적 가치와 문화를 짓누르는 물질주의의 유혹에 맞서, 그리고 이기주의와 분열을 일으키는 무한경쟁의 사조에 맞서 싸우기를 빈다"며 "새로운 형태의 가난을 만들어 내고 노동자들을 소외시키는 비인간적인 경제 모델들을 거부하기를 빈다"고 강론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을 다룬 책 '교황과 98시간'(메디치)의 공저자인 김근수 해방신학연구소장은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당시 교황의 발언에 관해 "한국천주교의 중산층화를 아주 세게 비판하셨다. 다른 나라에서는 에둘러 말했는데 한국에서는 직설법으로, 주교들을 면박하는 정도로 경고하신 것"이라고 풀이했다.

세월호 유가족 위로하는 프란치스코 교황(서울=연합뉴스) 프란치스코 교황이 2014년 8월 16일 오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시복식'에 앞서 카 퍼레이드를 하던 중 세월호 희생자 유가족 김영오 씨를 위로하고 있다. [천주교 교황방한위원회 제공=자료사진]

김 소장은 "교황님의 가난한 사람을 편드는 행보는 아주 놀라웠고 그것이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준 것 같다"며 "광화문광장에서 세월호 희생자 김유민 양의 아버지 김영호 씨의 손을 잡아준 것은 아주 극적인 감동을 줬다"고 덧붙였다.

◇ 한반도 평화 염원…"일흔일곱 번까지도 용서해야"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상 유일의 분단국인 한반도 평화를 간절하게 기원했다.

방한 첫날 청와대에서 박근혜 당시 대통령을 비롯한 공직자들을 향해 한 연설에서 "저는 한반도의 화해와 안정을 위하여 기울여 온 노력을 치하하고 격려할 뿐"이라며 "한국의 평화 추구는 이 지역 전체와 전쟁에 지친 전 세계의 안정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우리 마음에 절실한 대의"라고 말했다.

청와대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서울=연합뉴스) 도광환 기자 = 프란치스코 교황이 2014년 8월 14일 오후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정상연설을 마친 뒤 연설장을 나서고 있다. [자료사진]

명동대성당에서는 집전 중인 미사가 "한민족의 화해를 위하여 드리는 기도"라고 의미를 부여하고서 "모든 한국인이 같은 언어로 말하는 형제자매이고 한 가정의 구성원들이며 하나의 민족"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형제가 죄를 지으면 몇 번 용서해야 하느냐'는 베드로의 질문에 예수가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답했다는 이야기를 담은 마태복음 18장을 인용하고서 이것이 "화해와 평화에 관한 예수님 메시지의 깊은 핵심"이라고 강론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모든 한국인이 같은 언어로 말하는 형제자매이고 한 가정의 구성원들이며 하나의 민족"이라며 "대화하고, 만나고, 차이점들을 넘어서기 위한 새로운 기회들이 샘솟듯 생겨나도록 우리 모두 기도하자"고 권했다.

전세기에서 기도하는 프란치스코 교황(교황 전세기=연합뉴스) 박성진 특파원 = 프란치스코 교황이 2014년 8월 13일(현지시각) 방한 전세기 내에서 수행 기자들을 찾아 이날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희생된 이탈리아 사진기자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 [자료사진]

평화의 메시지를 한반도에 국한하지는 않았다.

교황은 한국에 오는 도중 전세기로 중국 영공을 지나면서 시진핑 국가주석과 중국인을 향한 축복 메시지를 전하기도 했다. 방한 중 아시아주교단을 상대로 한 연설에서는 "아직 성좌(교황청)와 완전한 관계를 맺지 않고 있는 아시아 대륙의 몇몇 국가들이 모두의 이익을 위해 주저 없이 대화를 추진해 나가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 초기 순교자 124위 시복…"역사 바로잡고 유교·천주교 화해"

프란치스코 교황은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윤지충(1759∼1791) 바오로를 비롯한 순교자 124위의 시복을 선언함으로써 선교사들이 한반도에 파견되기 전 목숨을 걸고 초기 한국 천주교회를 일군 이들을 신앙의 본보기로 공인했다. 시복은 거룩한 삶을 살았거나 순교한 이에 대해 엄격한 심사를 거쳐 공경의 대상을 의미하는 '복자'(福者) 칭호를 허가하는 교황의 공식 선언이다.

시복미사 집전하는 프란치스코 교황(서울 사진공동취재단=연합뉴스) 2014년 8월 16일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이 시복식 미사를 집전하고 있다. [자료사진]

교황은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시복 미사에서 "순교자들의 유산은 (중략) 이 나라와 온 세계에서 평화를 위해, 그리고 진정한 인간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 이바지하게 될 것"이라며 "한국인들에게 그 풍요로운 역사의 한 장이 됐다"고 규정했다.

당시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 총무로 활동한 류한영 신부는 "시복은 정치범으로 몰려 처형된 무고한 순교자들의 숭고한 행위가 헛되지 않고 영원한 생명으로 이어졌음을 선포하고 오해받은 역사를 바로잡는 것"이라며 "순교자들이 박해자를 증오하지 않고 기꺼이 죽음을 맞은 정신을 살려 유교와 천주교가 화해한다는 의미도 있다"고 해석했다.

sewonlee@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댓글 0
인기순
최신순
불 타는 댓글 🔥

namu.news

ContáctenosOperado por umanle S.R.L.

REGLAS Y CONDICIONES DE USO Y POLÍTICA DE PRIVACIDAD

Hecho con <3 en Asunción, República del Paragu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