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도광환 기자 = '마지막'이라는 단어로부터 아쉬움을 느끼는 건 인지상정이다. 생명이든, 업무든, 과정이든 마찬가지다. 아쉬움 넘어 다른 감정도 든다. '경건함'이다.
예술가들에게 '마지막'이란 작품이다. 작품을 통해 말하기 때문이다. 갑자기 세상을 떠났든, 스스로 목숨을 끊었든, 죽음을 앞두고 자신이 구축해온 세계를 정리했든, 그들이 남긴 마지막 작품을 통해 아쉬움과 경건함을 살펴보자. 11명 작가다.
'점묘법'을 완성한 조르주 쇠라(1859∼1891) 미완성 유작은 '서커스'(1891)다. 이전에 비해 역동성을 가미한 '서커스'는 사람들의 다양한 시선과 표정, 사선 구도 등으로 다른 점묘법 작품보다 훨씬 공을 들였을 거라고 추측한다. 색채론을 깊게 탐구해 미술과 과학을 결합시킨 점묘법은 수없이 많은 점이 일군 위대한 성과다.
빈센트 반 고흐(1853∼1890) 마지막 작품은 흔히 '까마귀 나는 밀밭'으로 알려졌지만, '나무뿌리'(1890)라는 작품을 그 후 작품으로 본다. 대지와 시대에 뿌리박고 싶었던 그의 마음이 느껴져 애처롭다.
파블로 피카소(1881∼1973) 최후 작품은 자화상(1972)이다. 누구보다 자존심 강한 삶을 살았지만, 동그랗게 뜬 큰 눈, 거칠게 돋은 수염, 꾹 다문 입 등에서 자기 미술 세계에 대한 '마지막 회의'를 감지할 수 있다.
육체적, 정신적 고통 속에 일생을 보낸 프리다 칼로(1907∼1954)가 죽기 전 그린 그림은 수박 정물화(1954)다. 수박 위에 쓴 '인생이여 만세(ViVA LA ViDA)'에서 숙연한 종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고통을 희망으로 승화시킨 대표적 사례다.
그녀의 영원한 연인이었던 디에고 리베라(1886∼1957)의 마지막 그림도 '수박'(1957)이다. 그녀를 사랑하기도, 괴롭히기도 했던 리베라의 이 작품은 그녀에게 바치는 송가(送歌)였을까?
'검은 피카소'로 불리며 '죽음'이라는 주제를 끈질기게 작품에 투영한 장 미쉘 바스키아(1960∼1988)는 불과 27세 나이에 마약중독으로 생을 마감한 화가다. '죽음을 타고'(1988)는 자기 죽음을 예견한 듯한 처연함을 동반하면서 영광 뒤에 도사린 고통을 상상하게 만든다.
바스키아와 함께 그라피티 미술에 새 경지를 개척한 키스 해링(1958∼1990)의 미완성 그림은 '작품'이라고 부를 수 없을지 모르겠다(1989). 초기 작업을 하다 중단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본 구성과 흘러내린 물감 자국 등에서 어떤 완성 작품보다 작가의 간절함이 묻어 있는 듯해 더 오래 들여다보게 된다.
이 작품은 2023년 말, 인공지능(AI)이 완성한 추정 작품이 공개돼 '작가에 대한 모독'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시대를 거슬러 렘브란트 반 라인(1606∼1669) 마지막 작품을 보자. 미완성 종교화, '아기 예수를 안은 시메온'(1669)이다. 이는 성서 한 장면을 그린 그림이 아닐지도 모른다. 궁핍과 고독 속에서 죽은 대가는 그림 속 아기처럼 어떤 이에게 안기고 싶었거나, 시메온처럼 어떤 이를 다정히 안고 싶었을 거다.
말년에 큰 수술을 받은 뒤 붓을 들기 어려워 종이를 오려 붙이는 작업, 즉 '절지화(Cut-off)'에 매진했던 앙리 마티스(1869∼1954)가 그린 '라 제르브(La Gerbe·1953)'는 갖가지 색깔을 입은 풀이 도약하듯 요동치는 작품이다. 자유로운 손의 부활을 기대하는 작가 마음이 오롯이 담겨 있는 듯하다.
조지아 오키프(1887∼1986)는 오랜 시간 뉴멕시코 광야에서 자연과 하나 되는 삶을 살았다. 마지막 작품도 뉴멕시코 자연을 그린 것이다. 1972년 그린 'The Beyond'에는 90대 노년 화가의 관조와 초월이 잔뜩 스며 있다.
끔찍한 자살로 생을 마감한 색면회화 대가, 마크 로스코(1903∼1970) 최종 작품은 제목이 없다. 대신 스스로 생을 마감할 것을 예고하듯 온통 붉은색으로 붓질했다(1970). 그는 생전에 자기 작품을 약 46㎝ 앞에서 감상하라는 조언을 남겼는데, 이 작품을 직접 마주하면 차마 그러기 어려울 것 같다.
미국 야구 영웅 중 한 명인 요기 베라(1925∼2015)가 남긴 명언이 회자한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It ain't over till it's over)"
'승부는 예단할 수 없으니 끝까지 최선을 다하라'는 뜻이지만, 이를 예술가들에게 적용해보고 싶다. 그들 삶은 종료됐지만, 끝난 게 아니다. 남긴 작품들을 후세 사람들이 향유하고 감동하면서 그들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예술가들에게 한정할 필요가 없다. 우리 같은 범인(凡人)도 마찬가지다. 작품 대신 우리가 후손에게 물려줄 건 사랑이다. 꿋꿋하게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스스로에 대한 사랑이다. 사랑은 욕망과 분노를 이겨내는 굳센 힘이다. 그러면 후세들은 안다. 우리가 살아 온 진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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