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컬의 재발견] 국경 지키던 연천 당포성…별 찾는 명소로 변신

[※ 편집자 주 = 저출산·고령화와 청년 유출로 지역 소멸 위기가 커지는 가운데 연합뉴스는 발상의 전환을 통해 각 지역의 숨은 자랑거리와 이야깃거리를 재발견하는 기획을 시작합니다. 문화·경제·사회 전반에서 인물, 음식, 문화재, 특산물, 관광지 등은 물론 차별화된 경쟁력을 지닌 다양한 아이템을 발굴해 매주 토요일 송고할 예정입니다. 이를 통해 지역의 자부심 제고, 관광 활성화, 새로운 성장동력 발굴 등을 추진함으로써 지역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합니다.]

(연천=연합뉴스) 심민규 기자 = 경기 연천군 미산면 임진강 북안에는 강변 절벽을 성벽처럼 삼은 고구려성 당포성이 남아 있다.
당포성은 임진강과 당개나루로 흘러드는 하천이 만나는 약 13m 높이의 삼각형 절벽 위에 축조된 방어시설이다.
고구려 병사들에게 이곳은 강을 건너거나 강을 따라 움직이는 세력을 감시하고 방어하는 군사 거점이었다.
성 위에 오르면 임진강변이 한눈에 펼쳐진다. 왜 고구려 병사들이 이곳에 성을 쌓았는지 짐작할 수 있을 만큼 주변을 살피기 좋은 지형이다.
1천50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지금, 당포성에 오르는 사람들은 강 너머 적을 살피는 대신 고개를 들어 밤하늘의 별을 찾는다.

◇ 고구려 남쪽 국경 지킨 당포성…노을·별빛 명소로
당포성은 강변 절벽 위 평탄한 지형에 쌓은 고구려의 '강안평지성'이다. 강가의 절벽이나 하천 같은 자연 지형을 방어시설로 활용하고, 필요한 일부 구간에만 성벽을 쌓은 성이다.
당포성은 임진강과 당개나루터로 흘러드는 하천이 만든 삼각형 절벽 위에 축조됐다.
강에 접한 두 면은 수직에 가까운 절벽이어서 별도의 성벽을 쌓지 않았고, 평지로 이어져 적이 접근하기 쉬운 동쪽에만 현무암으로 성벽을 만들었다.
고구려는 한강 유역에서 후퇴한 뒤 6세기 중엽부터 7세기 후반까지 약 120년 동안 임진강을 남쪽 국경으로 삼았다.
이 시기 임진강 하류에서 상류 쪽으로 덕진산성, 호로고루, 당포성, 무등리 보루 등 10여개의 성을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했다.
특히 당포성 일대는 강이 크게 굽어 흐르며 물살이 느려져 강을 건너기 쉬운 여울목이었다.
양주 방면에서 북상하는 세력이 임진강을 건너 개성으로 향하는 길목에 해당해 고구려 입장에서는 반드시 지켜야 할 전략적 요충지였다.

당포성은 고구려 시기에 처음 축조됐지만, 신라가 이 지역을 점령한 뒤에도 성벽을 고쳐 쌓아 계속 사용했다.
이 때문에 성 내부에서는 고구려 기와와 함께 신라 기와도 다수 출토됐다.
현재는 정비사업을 거쳐 성벽 위로 오르는 계단과 목제 데크, 순환로 등이 마련돼 있다. 성 위에는 팽나무 한 그루가 홀로 서 있어 당포성의 상징처럼 자리 잡았다.
지난 11일 오후 차를 타고 당포성 입구 쪽으로 들어서자 '별 볼 일 있는 당포성'이라는 안내판이 먼저 방문객을 반겼다.
성으로 다가가자 동쪽 성벽에는 현무암으로 보강한 벽이 보였고, 성 내부와 주변에는 흙을 덮고 잔디를 입힌 정비 흔적이 남아 있었다.
해가 지기 전 당포성에는 노을을 보기 위해 찾아온 관람객들이 있었다.
오후 8시께 분홍빛으로 물든 하늘과 푸른 잔디가 덮인 성곽, 성 위에 홀로 선 작은 팽나무가 어우러졌다.
낮 동안 고구려 국경 방어성의 흔적을 보여주던 공간은 해가 지고 어둠이 내려앉자 전혀 다른 얼굴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 팽나무 위 북두칠성…밤이 깊을수록 또렷
밤이 찾아오자 당포성에는 별을 보려는 가족과 연인 등 방문객들의 발걸음이 이어졌다. 오후 10시가 넘어가자 주변 광해가 줄고 하늘은 점점 더 검게 변했다.
이날은 소나기가 내리고 날도 흐렸다. 한때 구름이 하늘을 덮어 별을 보기 어려울 것처럼 보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구름 사이로 별빛이 드러났다.
밤이 깊어질수록 별은 더 또렷해졌다.
고개를 들어 올릴 때마다 별들이 콕콕 눈에 박히듯 들어왔다. 홀로 선 나무 위로는 북두칠성이 걸렸고, 잠시 뒤 별똥별 하나가 하늘을 가르며 떨어졌다.

당포성이 최근 별 관측 명소로 입소문 난 이유는 단순하다. 주변이 어둡고, 하늘이 넓게 열려 있기 때문이다.
수도권 도심에서는 가로등과 상업시설 조명, 차량 불빛 때문에 별을 보기 어렵다. 반면 당포성 주변은 민가와 상업시설이 많지 않아 밤이 깊어질수록 인공조명의 영향이 줄어든다.
성 자체가 임진강과 하천이 만든 절벽 위에 자리한 점도 별 관측에 유리하다. 성 위로 오르면 임진강변이 넓게 펼쳐지고, 주변을 가리는 높은 건물이나 조밀한 시설물이 많지 않아 하늘이 크게 열린다.
당포성의 상징처럼 자리한 성 위의 작은 팽나무도 별 관측 명소화에 한몫했다.
낮에는 잔디밭 위에 외로이 선 나무처럼 보이지만, 밤이 되면 별빛과 함께 사진 구도를 만드는 실루엣이 된다.
당포성에는 별을 보러 온 사람들 사이에 지켜지는 암묵적인 규칙도 있었다.
자동차 헤드라이트는 오래 켜두지 않고, 손전등이나 휴대전화 플래시는 최대한 끈다.
조용히, 온전히 별을 볼 수 있도록 서로의 어둠을 지켜주는 식이다.
당포성 인근에서 약 10년 동안 펜션을 운영했다는 한 업주는 "당포성은 우리나라에서 별 보기 가장 좋은 곳이라고 생각한다"며 "주말이면 가족이나 연인들이 별을 보러 많이 찾는다"고 말했다.
그는 별을 더 잘 보는 자신만의 방법도 알려줬다.
"두 손을 눈 옆에 대고 주변 빛을 가린 뒤 하늘을 보면 별에 더 집중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훨씬 잘 보여요."
그는 "예전에는 역사 유적지로만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요즘은 별을 보러 오는 손님들이 당포성을 먼저 이야기한다"고 말했다.
◇ 호로고루·은대리성과 이어지는 연천의 고구려 방어선
당포성만 보고 돌아서기에는 연천의 고구려성이 품은 이야기가 적지 않다.
연천에는 당포성과 함께 3대 고구려성으로 불리는 호로고루, 은대리성 등 임진강·한탄강 유역의 고구려 성곽이 남아 있다.
세 성은 모두 강가 절벽이라는 자연지형을 방어시설로 활용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당포성을 찾기 전 들른 연천군 장남면 임진강변에 위치한 호로고루는 당포성보다 넓고 개방적인 인상을 줬다.
넓게 펼쳐진 잔디밭 위에 성이 자리했고, 강가에서는 수심이 얕은 곳까지 들어가 민물고기를 낚는 사람들도 보였다.
한 관광객은 "일이 있어 연천에 들렀는데 호로고루라는 이름이 독특해서 찾아왔다"고 말했다.
호로고루는 삼국시대 시절 '호로하'라고 불렀던 임진강의 옛 이름과 '고루', 즉 오래된 보루·성을 뜻하는 말이 결합한 명칭으로 알려져 있다.
호로고루가 있는 고랑포 일대는 임진강 하류에서 배를 타지 않고 강을 건널 수 있는 주요 여울목과 가까워 삼국시대부터 군사·교통상 요충지로 꼽혔다.
고구려가 한강 유역에서 후퇴한 뒤 임진강은 한동안 고구려와 신라의 국경 역할을 했고, 호로고루는 이 방어체계의 핵심 성곽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호로고루에는 북쪽을 바라보는 쪽에 통일을 기원하는 망향단도 설치돼 있었다. 강 건너 북녘과 멀지 않은 접경지역이라는 현실을 보여주는 공간이다.
이날 호로고루 인근에서는 군부대 훈련으로 추정되는 포성도 울렸다.
고구려 때는 남쪽에서 북상하거나 북쪽에서 남하하는 세력을 막기 위해 성을 쌓았지만, 지금은 남북 분단의 접경지라는 전혀 다른 긴장감이 이 일대에 남아 있다.
고대의 국경 방어선과 현대의 접경지역이 한 공간에 겹쳐 있는 셈이다.
호로고루도 당포성처럼 별을 보기 좋은 조건을 갖춘 곳으로 보였다. 넓은 잔디밭과 트인 시야, 낮은 주변 조명은 밤하늘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충분한 이유가 된다.
연천의 고구려성들은 거대한 관광시설이 아니다. 화려한 조명이나 상업시설도 없다. 대신 어둠이 있고, 임진강 절벽 위를 스치는 바람이 있고, 조용히 하늘을 올려다볼 수 있는 시간이 있다.
국경을 지키던 고구려성들이 이제는 별빛을 따라 찾는 접경지역의 밤 여행지로 새롭게 읽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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