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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VIBE] 김울프의 K-지오그래피…겨울과 봄 사이에 만나는 양양의 파도

연합뉴스입력
겨울 바닷가의 서퍼들 (양양=연합뉴스) 유형재 기자 = 4일 강원 양양군의 한 해변에서 서퍼들이 높은 파도를 기다리고 있다. 2026.1.4 yoo21@yna.co.kr (끝)
[※ 편집자 주 = 한국국제교류재단(KF)의 2024년 발표에 따르면 세계 한류 팬은 약 2억2천500만명에 육박한다고 합니다. 또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초월해 지구 반대편과 동시에 소통하는 '디지털 실크로드' 시대도 열리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한류 4.0'의 시대입니다. 연합뉴스 동포·다문화부 K컬처팀은 독자 여러분께 새로운 시선으로 한국 문화를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되고자 전문가 칼럼 시리즈를 준비했습니다. 시리즈는 매주 게재합니다.]
겨울 양양 파도[김울프 작가 제공]
파도를 타는 '서핑'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많은 사람은 서프보드나 기술을 떠올리지만, 사실 가장 중요한 것은 양질의 파도다. 너울이 닿는 바다라면 파도는 어디에나 생기지만 서핑을 할 만한 크기와 힘을 가진 파도는 어디에나 만들어지지 않는다.
겨울 양양 해변[김울프 작가 제공]
지리적인 위치와 주변의 수심, 해저의 모양과 저질이 적절한 조건을 갖춰야 한다. 여기에 달의 움직임에 따른 조석의 변화가 더해지고, 계절과 날씨에 따른 바람의 영향이 적절해야 한다. 바람이 없거나 파도의 방향과 잘 맞을 때 비로소 서퍼들이 탈 만한 파도가 잠깐 모습을 드러낸다.
겨울 양양 해변[김울프 작가 제공]
좋은 파도는 하늘에서 내리는 눈과도 닮았다. 언제 내릴지 예측하기 어렵고, 이따금 한 번씩 찾아왔다가 사라진다. 잠깐 나타났다가 다시 사라지는 그 순간을 기다리는 것이 서핑이라는 활동의 본질이다.
파도 타는 서퍼들…양양의 한 해변 (양양=연합뉴스) 유형재 기자 = 4일 강원 양양군의 한 해변에서 서퍼들이 높은 파도를 타며 서핑을 즐기고 있다. 2026.1.4 yoo21@yna.co.kr (끝)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우리나라라고 해서 서핑이 가능한 파도가 어디서나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 가운데 강원도 양양은 동해안에서도 서핑으로 이름난 곳이다. 우리나라 서핑의 역사는 길지 않다.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 당시 20~30대를 중심으로 서핑 문화가 조금씩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 이전에도 해외에서 서핑을 경험한 사람들과 바닷가 지역에 살던 사람들의 작은 움직임이 있었다. 인터넷이 보급되면서 온라인 카페를 중심으로 정보 교류가 시작됐다. '서프코리아', '서퍼스 파라다이스' 같은 커뮤니티를 통해 서핑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서로의 경험을 공유했다. 제주와 부산에서 작은 서핑 대회가 열리면서 전국에서 모인 애호가들이 교류했고, 그 과정을 통해 국내 서핑 문화의 씨앗이 싹트기 시작했다. 서핑에 사로잡힌 여러 개척자가 파도를 찾아 전국을 떠돌던 2000년대 중반, 강원도 양양은 많은 서핑 애호가가 가장 먼저 정착하기 시작한 지역 가운데 하나였다. 파도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오늘 파도가 어디에서 가장 좋을까'를 찾아다니는 이들이 생겨났다. 해안가를 따라 잘 만들어진 도로를 달리며 파도의 방향과 바람의 방향을 살피고, 그날 더 좋은 파도가 형성되는 포인트를 찾아 이동했다. 서로 마주치면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정보를 공유하던 그 시절에는 막 시작되는 문화 특유의 풋풋함과 활기가 양양에 흐르고 있었다. 당시 양양의 분위기는 지금과 사뭇 달랐다. IMF 이후 이어진 경기 침체의 영향으로 동해안 일대는 관광객의 발길이 뜸했고, 다소 휑한 느낌마저 있었다. 그러나 그 덕분에 낮은 임대료가 형성돼 젊은이가 정착하기에 부담이 적었다. 서핑은 파도가 있는 곳으로 가야만 할 수 있는 활동이다. 그래서 서핑을 즐기려면 결국 바닷가에서 살아야 한다. 이런 이유로 양양에는 서핑을 이유로 이주해 온 사람이 조금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유동 인구가 늘어나면서 서핑숍과 음식점 등 작은 가게도 하나둘 생겨났다. 전국 각지에서 '파도' 하나를 보고 찾아온 사람이 모여 살기 시작했다. 자연 속에서 뛰놀던 어린 시절의 기억을 가진 사람이 자라 스스로 이곳에서 살기를 선택한 동네인 양양은 그렇게 '살고 싶은 동네'가 돼갔다. 자연을 중심으로 한 라이프스타일, 파도를 타는 이웃, 자신이 원하는 환경에서 살고 싶어 하는 젊은 세대에게 양양은 하나의 대안적인 삶의 방향이 됐다. 2009년 서울-양양 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양양은 서울에서 훨씬 가까운 곳이 됐다. 수도권에서 바다로 향하는 길이 크게 단축되면서 더 많은 사람이 이곳을 찾기 시작했다. 여기에 당시 겨울 스포츠로 유행하던 스노보드를 즐기는 사람이 대거 유입되면서 서핑 문화는 더욱 빠르게 확산됐다. 파도가 없는 날에도 한적한 해변은 도시의 답답함을 벗어난 휴식 공간이 됐다. 파도가 작더라도 입문자가 배우기에는 충분한 파도가 생겼기 때문에 양양을 찾는 발길은 끊이지 않았다. 물론 모든 사람이 서핑의 매력을 이해하는 것은 아니었다. 어떤 사람은 파도가 없는 날의 바다를 보고 "이렇게 작은 파도에 무슨 서핑을 하느냐"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은 파도를 타는 경험을 위해 다시 양양을 찾았다. 처음에는 서핑 문화를 낯설게 바라보던 사람도 주변에서 서핑을 경험한 이야기가 늘어나면서 "나도 언젠가 한 번 해볼까?" 하는 생각을 갖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또 다른 변곡점이 찾아왔다. 코로나19 시기 전후로 해외여행이 막히고 국내 여행이 활발해지면서 양양에는 더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서핑과는 관계없는 밤 문화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술과 헌팅, 파티가 중심이 된 관광 문화가 확산하면서 다양한 사회적 문제가 생겼다. 양양은 서핑으로 이름난 지역이었기 때문에 이런 문제는 자연스럽게 서핑 문화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로 이어졌다. 결국 "양양 가서 앙앙할래?"라는 조롱 섞인 표현까지 등장하면서 양양의 서핑은 또 다른 전환점을 맞게 됐다. 하지만 정작 서핑이라는 활동은 그런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세계에 있다. 눈길을 끌기 쉬운 갈등과 혐오, 비난이 쉽게 확산하는 시대지만 서핑은 자연 속에서 파도를 타는 활동이다. 파티 문화와는 오히려 정반대의 생활 리듬을 가진다. 서핑을 하는 사람은 밤에 잠을 잔다. 가장 좋은 파도가 생기는 시간은 동틀 녘이기 때문이다. 새벽에 파도를 타기 위해서는 일찍 잠들어야 한다. 서핑의 파도에서 가장 큰 변수 가운데 하나는 바람이다. 대류 현상에 의해 바다와 육지는 태양열을 받는 속도가 다르기 때문에 항상 온도 차가 생기고 바람이 분다. 밤새 햇볕을 받지 않은 바다와 육지의 온도가 가장 비슷해지는 시간은 동틀 녘이다. 그때 바람은 가장 약해지고 파도의 표면은 매끈해진다. 바람이 강하면 파도의 면이 거칠어지거나 모양이 흐트러져 서핑이 어려워진다. 그래서 많은 서퍼들이 새벽 시간을 기다린다. 그 잠깐의 시간을 위해 평생 살아온 곳을 떠나 양양에 정착한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들은 몇 년째 이유 없는 비난과 오해 속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양양의 서핑 문화는 지금 긴 겨울을 지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겨울의 양양 바다에는 여전히 멋진 파도가 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양양의 풍경도 바로 그 겨울 바닷가다. 특히 12월과 1월보다 겨울과 봄의 경계에 있는 2월과 3월에 눈이 많이 내린다. 2월말에는 시베리아 고기압의 세력이 약해지고 동해 위로 따뜻한 수증기를 머금은 북동풍이 강하게 불어와 3월까지 춥다. 찬 대륙 공기가 상대적으로 따뜻한 동해를 지나면서 해수면과의 온도 차, 이른바 '해기차'로 인해 대기가 불안정해진다. 많은 수증기가 공급된 공기가 양양 서쪽의 태백산맥에 부딪히며 상승하면서 눈구름이 크게 발달한다. 상층의 찬 공기가 북동풍을 타고 따뜻한 해수면 위로 내려오면서 수증기를 더 공급받고, 그 결과 동해안에는 많은 눈이 내리게 된다. 눈이 쌓인 바다, 그리고 그 바다 위에서 파도를 타는 사람들의 풍경. 그 장면은 쉽게 잊히지 않는다. 오랫동안 마음속에 남아 삶의 좋은 영양제가 된다. 눈보다 더 하얀 것이 있을까. 눈부시게 빛나는 하얀 눈은 차이와 경계가 만들어낸 시간의 선물이다. 서로 다른 공기와 온도가 만나 충돌하고 섞이면서 눈이 만들어지듯, 우리 삶의 많은 아름다운 순간도 서로 다른 것들이 부딪히며 생겨난다. 차이를 발견할 때마다 미움을 드러내는 시대의 흐름에 피로감을 느낄 때면, 나는 눈 쌓인 양양의 바다를 떠올린다. 하얀 눈과 함께 부서지는 하얀 파도. 스치고 지나가는 것들 속에서도 서로 부딪혀 어울리는 순간이야말로 가장 의미 있는 장면이 아닐까.

봄이 오기 전 잠깐 스쳐 지나가는 양양의 눈처럼, 그 풍경은 오래 남는다. 그리고 다시 파도를 기다리게 만든다.

김정욱 (크루 및 작가 활동명 : KIMWOLF)

▲ 보스턴 마라톤 등 다수 마라톤 대회 완주한 '서브-3' 마라토너, 100㎞ 트레일 러너 ▲ 서핑 및 요트. 프리다이빙 등 액티비티 전문 사진·영상 제작자 ▲ 내셔널 지오그래픽·드라이브 기아·한겨레21·주간조선·행복의 가득한 집 등 잡지의 '아웃도어·러닝' 분야 자유기고가

<정리 : 이세영 기자>

seva@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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