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듭된 테스트와 전면적인 월드 재구성, 유저 피드백 기반의 개선을 통해 콘텐츠와 구조 모두를 새롭게 구축
‘기록으로 남는 게임 개발’이 어떻게 다음 세대의 자산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 사례

2023년 정식 출시된 넥슨의 '프라시아 전기'는 단순한 신작 MMORPG 그 이상이었다. 원채널 기반의 시니스 월드에 수십 개 영지를 배치하고, 수백 명이 동시에 실시간으로 벌이는 거점전을 중심 콘텐츠로 삼은 이 프로젝트는, 기획부터 런칭까지 7년 3개월의 시간을 들인 대규모 시도였다. NDC 2025 강연자로 참석한 넥슨코리아 이익제 PD는 이 게임의 개발 디렉터로 7년 넘게 참여한 인물로, 이번 강연에서 총 276일간의 테스트, 54회의 빌드, 그리고 약 200명의 개발 인력이 투입된 빅 게임의 여정을 기록과 데이터 중심으로 회고했다.

◇ 한 줄기의 아이디어에서, 기술적 기반을 넘기까지
'프라시아 전기'의 출발점은 2018년 1월, 단 22명의 팀에서 시작된 초기 프로토타입이었다. 이미 ‘원채널 시니스 월드’라는 콘셉트와 핵심 기술 방향성은 구상된 상태였고, 이후 기획 직군이 합류하며 프로젝트의 골격이 잡히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단계는 빌드보다는 기술 구현 위주였고, 실제 플레이 가능한 형태의 게임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이때 가장 중요한 전환점은, 기술적으로 대규모 유저가 한 공간에 머물며 실시간 상호작용할 수 있는 기반을 구현했다는 점이다. 당시에는 ‘NGR’이라는 코드네임으로 불렸으며, 영지 점령, 실시간 전략, 거점 경영 같은 요소들을 MMORPG에 접목하는 방향으로 방향성이 설정됐다. 다만, 초기 목표가 엔드 콘텐츠에 지나치게 집중돼 있었다는 반성도 함께 나왔다. “기초 시스템을 먼저 고도화했다면 개발이 더 빠르게 진행됐을 것”이라는 회고가 이를 방증한다.

◇ 실시간 거점전, 상상에서 실체로
2018년 하반기부터 시작된 프리 프로덕션은 무려 2년 5개월에 걸쳐 진행됐다. 개발팀 규모는 이 시기에 128명까지 증가했다. 특히 코로나19 팬데믹은 팀 운영에 큰 타격을 줬지만, 동시에 개발 구조를 재정비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 시기의 핵심 과제는 ‘실시간 거점전’을 현실화하는 것이었다. 다만, 해당 콘텐츠는 게임업계에 마땅한 레퍼런스가 없어 팀원들에게 정확히 설명하기조차 어려웠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개발팀은 전략 플로우를 시각화한 ‘거점전 비전 영상’을 애니메이터와 함께 제작했다. 이 가상의 시나리오 영상은 실제 플레이가 구현되기 전부터 전략적 흐름과 전술 구조를 팀 전반에 공유하는 데 큰 역할을 했고, 이후 콘텐츠 설계와 UI, 맵 구조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참조 자료로 작용했다.
이후 개발팀은 스탠스 기반 전투 시스템(딜러, 힐러, 돌격, 막기 등)을 완성했고, 수십 개 영지가 연결된 월드 구조도 청사진을 갖추게 된다. 테스트에서는 “거점전은 흥미롭지만, 유저들이 과연 거기까지 플레이를 지속할 수 있을까”라는 핵심 피드백이 나왔고, 이로 인해 게임 초반의 완성도에 대한 고민이 깊어졌다.
◇ 월드 구조를 버리다, 밀도를 다시 짜다
2021년부터 시작된 본격적인 프로덕션 단계에서, 개발팀은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 기존에 구축한 월드 구조를 전면 폐기하고, 콘텐츠 밀도를 높이기 위한 재설계를 단행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카메라 시점을 높이면서 시야 확보 문제를 겪었고, 다시 회전 가능한 쿼터뷰 시점을 도입해 입체감을 복원하는 방식으로 구조를 보완했다.
테스트 결과는 고무적이었다. 본부 FGT에서는 실제 유저 300명 이상이 8일간 참여해 4개의 영지를 운영했고, 몬스터 처치 수, 자원 수익, 판매량 등 실제 운영 데이터를 통해 거점 경영의 유기적 작동이 검증됐다. 다만 조작의 난이도, 목표 타겟팅의 불편함, 성장 피드백 부족 등은 여전히 보완 과제로 남았다.
런칭 전 마지막 단계에서는 DB 초기화 없이 장기 테스트를 반복하며 데이터를 누적 수집했고, 동시에 캐릭터 소개 영상, 쇼케이스, 마케팅 자산 등 외부 커뮤니케이션 준비도 본격화됐다.
◇ 데이터 기반 테스트와 팀 빌딩의 교훈
이번 회고 발표의 후반부는 실제 게임보다 ‘어떻게 개발했는가’에 초점이 맞춰졌다. 발표자는 대형 프로젝트에서 중요한 요소로 다음 세 가지를 강조했다.

첫째, 핵심 리더의 선임과 팀의 체력 관리. “장기 프로젝트에서 정신력이 아닌 체력이 중요하다”며, 팔로우십과 솔직함, 지치지 않는 리더십을 핵심 자질로 꼽았다.
둘째, 데이터 기반 테스트와 피드백 우선순위 반영. 매 마일스톤마다 실제 유저의 플레이 로그, 시스템 운영 데이터, AI 분석을 통해 빠르게 방향을 수정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특히 피드백을 정제해서 후속 빌드에 반영하는 프로세스를 ‘수지 맞는 장사’라고 표현할 정도로 효율적이라 평가했다.
셋째, 다회차 개발 팀의 중요성. 이미 함께 일해본 팀은 의사결정과 속도 면에서 확실한 장점이 있으며, 이를 유지·보완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훨씬 생산적이라는 지적이다.

◇ ‘기록된 게임 개발’, 그 자체로 자산이 되다
'프라시아 전기'의 개발사는 게임 산업 내부의 수많은 시행착오와 조직 운영의 민낯을 데이터 중심으로 정직하게 풀어냈다. 그 결과물은 단순한 MMORPG의 성공 사례를 넘어, “대형 프로젝트는 이렇게 굴러간다”는 실증적 참고서로서의 가치가 크다.

현재 해당 발표자는 ‘프로젝트 EL’이라는 또 다른 대형 프로젝트를 이끌고 있으며, 초기부터 자동화, 기록 중심의 협업, AI 활용을 핵심 전략으로 삼고 있다. 이 PD는 발표를 마무리하며 이렇게 말했다. “조직원들의 기록이 남아 있었기에 이 발표도 가능했습니다. 이제는 기록과 구조가 곧 경쟁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