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편집자 주 = 한국국제교류재단(KF)의 지난해 발표에 따르면 세계 한류 팬은 약 2억2천5백만명에 육박한다고 합니다. 또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초월해 지구 반대편과 동시에 소통하는 '디지털 실크로드' 시대도 열리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한류 4.0'의 시대입니다. 연합뉴스 동포·다문화부 K컬처팀은 독자 여러분께 새로운 시선의 한국 문화와 K컬처를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되고자 전문가 칼럼 시리즈를 준비했습니다. 시리즈는 매주 게재하며 K컬처팀 영문 한류 뉴스 사이트 K바이브에서도 영문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강가에는 햇살보다 먼저 이른 기운이 내려앉는다.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안개와, 발목을 타고 드는 물의 서늘함, 그리고 조심스레 들이대는 족대 끝의 긴장. 나는 그 아침을 아직도 기억한다.
아버지는 매년 소만 무렵이면 강으로 향했다. 본격적인 더위가 오기 전, 한 번은 꼭 뱀장어를 잡아 가족 보양을 하신다고 했다.
"여름은 기다려주지 않거든."
아버지는 그렇게 말씀하시곤 족대와 지렛대를 챙기셨다. 나는 그 뒤를 따라 양동이를 들고 종종걸음을 했다. 뱀장어는 늘 깊은 소에 있었다. 절벽 아래로 물이 휘감아 흐르는 그 어두운 고요 속에서, 족대가 푹 찔리고 지렛대가 바위를 흔들면, 진득한 미끈거림이 손끝에 닿았다. 그 낯선 감촉에 기겁하면서도, 양동이에 담긴 뱀장어를 바라보는 순간은 왠지 든든했다. 우리 가족의 여름은 그렇게 시작됐다.
장어는 그저 고단백 생선이 아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믿었던 그 음식에는, 보약이 아니라 보살핌이 담겨 있었다.
잡아 온 장어는 우물가에서 손질했다. 칼등으로 문질러 비늘을 벗기고, 칼끝으로 내장을 꺼내던 아버지의 손놀림은 익숙했고, 그 장어를 받아 들고 마당으로 들어가던 어머니의 발걸음은 분주했다.
어머니는 늘 황기, 당귀, 당삼을 같은 양으로 준비해 두셨다. 장어탕에 향긋함을 보태는 박하잎은 마당 한켠에서 뜯어 오셨고, 무청 시래기와 고사리, 풋고추와 대파, 그리고 된장과 고추장, 마늘과 구기자까지 부엌 한쪽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커다란 가마솥의 아궁이에 장작을 지펴 올리고, 장어와 약재, 박하를 넣은 물이 끓기 시작하면, 집안엔 짙은 냄새가 퍼졌다.
향이 아니라 기운이 피어오르는 듯했다. 한 시간 넘게 끓인 국물은 우윳빛을 띠었고, 어머니는 그것을 체에 걸러냈다. 남은 육수는 투명하면서도 진했고, 그 안에 담긴 건 생선의 맛이 아니었다. 가족과 함께 한 추억과 사랑이 가득한 맛이다.
장어의 효능은 오래전부터 입으로 전해져 왔다. 비타민 A는 다른 생선보다 수십 배 높고, 비타민 B와 E는 피로를 풀고 노화를 늦춘다고들 했다. 오메가3 지방산이 뇌 기능을 돕고, 신장을 튼튼하게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러나 우리 가족에게 장어는 무엇보다 '기운' 그 자체였다. 정기를 보충하고 사기를 막는다는 고사 속 구절을 어머니는 매년 되새기셨다. "정기가 충만하면 병이 감히 들어올 수 없다"며 어머니는 내 숟가락에 한 국자 더 떠주셨다.
그 시절, 더위는 적이었고, 음식은 방패였다. 병원보다 음식이 먼저였고, 약보다 식탁이 믿음직했다.
지금은 장어가 귀한 음식이 됐고, 장어탕은 보양식당 메뉴판에서나 볼 수 있다. 하지만 어릴 적 우리 가족에게 장어는 그저 강에서 손수 구해오는 제철의 선물이었다.
더워지기 전에 기운을 채우고, 입맛이 떨어지기 전에 한 그릇으로 힘을 돋우는 일이었다. 어느새 도시에서 장어는 구이집 간판에나 걸려 있고, 보양은 카드 결제 뒤에 따라오는 서비스가 되어버렸지만, 내게 장어탕은 여전히 손과 정성과 시간으로 만든 음식이다.
그것은 한 가족이 한 계절을 함께 버티는 방식이었고, 한 계절을 준비하는 의식이었다.
손자병법으로 바라본 장어요리는 정면 돌파의 상징이다. 실을 지키고 허를 찌른다는 손자의 전략처럼, 장어구이는 본연의 담백함으로 정면 돌파를 시도한다.
기름기 적당한 살결 위로 은은한 숯불 향이 입혀진 장어는 기교 없이 실력을 증명한다. 장어탕은 허한 속을 따뜻하게 메우는 보양의 병법이다.
허기와 허약함, 몸에 깃든 냉기를 끓인 국물로 밀어낸다.
장어찜은 허와 실이 조화를 이룬다. 매콤하고 달큰한 양념이 허를 감추고, 그 속에 있는 실한 살결이 조용히 힘을 발휘한다.
장어튀김은 기습이다. 바삭한 튀김옷 안에 감춰진 장어의 풍미는 입안에서 허를 뚫고 나온다.
장어덮밥은 허를 가장한 실이다. 고슬고슬한 밥 위에 얹힌 장어 한 점은 평범해 보이지만, 한 숟가락 뜨는 순간 감춰진 진심이 드러난다.
장어볶음은 유혹이다. 자극적인 양념으로 입맛을 사로잡고, 그 안에 담긴 장어의 영양은 비로소 속에서 실로 남는다.
한국인의 식탁은 언제나 국물 위에 놓여 있었다. 국물은 뜨거워야 했고, 진해야 했다.
여름에도 우리는 식탁에서 뚝배기를 놓지 않는다. 장어탕도 그랬다. 땀을 흘리며 먹고 나서야 비로소 몸이 가벼워졌다. 뱀장어의 힘은 몸을 살리고 마음을 데운다. 장어 한 그릇에 담긴 국물은 여름을 준비하는 우리의 방식이자, 서로를 챙기던 정서의 표현이었다.
지금도 그 여름의 기억은 내게 생생하다. 발끝을 감싸던 강물의 냉기, 가마솥에서 피어오르던 장어탕의 냄새, 평상 위에 둘러앉은 가족과 이웃의 웃음소리. 그것은 하나의 계절을 함께 이겨낸 사람들의 풍경이었다.
계절 음식은 영양 섭취만이 목적이 아니었다. 여름을 지나는 마음의 자세였고, 서로를 걱정하고 보살피는 방식이었다. 장어탕은 그 모든 기억을 데워주는 그릇이었다.
여름이 다시 시작되는 지금, 그때의 기억을 되살려 장어탕을 끓여본다. 비록 손질은 시장에 맡기고, 약재는 포장된 것을 사야 하겠지만, 그 한 그릇 안에 담긴 의미만은 예전처럼 꺼내어 볼 수 있다. 기운을 나누고 정성을 전하는 것, 그것이 장어탕의 진짜 맛이다.
최만순 음식 칼럼니스트
▲ 한국약선요리 창시자. ▲ 한국전통약선연구소장. ▲ 중국약선요리 창시자 팽명천 교수 사사 후 한중일 약선협회장 역임.
<정리 : 이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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