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정 한국수출입은행 대외협력기금(EDCF) 카이로 소장

[※ 편집자 주 = 연합뉴스 우분투추진단이 국내 주요대학 아프리카 연구기관 등과 손잡고 '우분투 칼럼'을 게재합니다. 우분투 칼럼에는 인류 고향이자 '기회의 땅'인 아프리카를 오랜 기간 연구해온 여러 교수와 전문가가 참여합니다. 아프리카를 다양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분석하는 우분투 칼럼에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기대합니다. 우분투는 '당신이 있어 내가 있다'는 뜻의 아프리카 반투어로, 공동체 정신과 인간애를 나타냅니다.]

탄자니아, 가나, 이집트에 거주하는 동안 한국과 다른 문화적 차이를 겪었다. 인간은 자신이 자라온 문화적 환경 내에서 현실을 인식한다. 또 자신이 느끼는 현실이 '정확한 인식'이라 믿는다. 이에 따라 발생하는 문화적 차이는 어떤 나라를 가도 겪기 마련이다. 한국과 다른 문화와 마주할 때 우리는 새로운 문화에 대한 기대와 함께 생소한 문화를 잘 받아들일 수 있을지에 대한 두려움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 문화적 차이에 대한 인식은 항상 주관적이라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필자가 주재원으로 머물렀던 이들 나라와 한국을 전반적으로 비교하면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이들 국가는 권력 간격이 한국보다 강하다. 권력 간격이란 한 사회에서 권력이 약한 사람이 권력 불평등을 인정하고, 이를 당연하거나 정상적인 것으로 인식하는 정도를 말한다. 권력·지위·돈·학력을 갖춘 이들이 우월적인 면을 남용해도 그에 대한 저항감이 한국보다 낮다.
탄자니아에서 지방 도시 출장 중 겪었던 일이다. 현지에서 운전기사와 차량을 빌려 상수도 청장을 면담하러 가는 길이었다. 교통경찰이 운전 기사에게 벌금을 부과했다. 뒷좌석에 앉은 필자가 안전벨트를 매지 않았다는 터무니없는 이유였다. 필자는 그 자리에서 인터넷으로 탄자니아 교통법규를 확인했다. 이어 교통경찰에게 탄자니아는 앞 좌석만 안전벨트가 의무 사항이고, 뒷좌석은 권고사항'이라는 법 조항을 보여줬다. 그러나 경찰은 모바일 기기로 벌금 고지서가 출력됐기 때문에 본인이 취소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부조리를 바로잡기 위해 가까운 경찰서를 찾았다. 그러나 민원 담당 경찰관은 자리에 없었다. 어렵게 받은 연락처로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이 억울한 일을 해결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 사건은 지방 상수도 청장과 면담 중에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나오면서 쉽게 해결됐다. 상수도 청장은 이야기를 듣자마자 민원 담당 경찰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는 상수도 청장과 면담 후 경찰서에서 민원 담당자를 만나 이 억울한 일을 해결했다.
이 일을 해결하자 운전기사는 "오랜 기사 생활 중 민원 담당 경찰을 만나거나, 전화 연결이 된 적이 한 번도 없었다"면서 "상수도 청장의 연락으로 민원 담당자를 처음 볼 수 있었다"고 놀라워했다. 이 사건 이후 필자는 휴대폰에 고위직과 찍은 사진을 저장해 두고 다녔다. 사소하지만 부당한 일을 당할 때 그 사진을 보여주고 종종 무사통과했다.
아프리카의 많은 국가 대통령 후보들은 부정부패 척결을 첫 번째 공약으로 내세운다. 이 공약에 대해 주변 현지인에게 물으면 누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고질적이고 만성적인 부정부패가 크게 줄어들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필자가 노골적인 부정부패에 분개하면 간혹 현지 직원들은 그만한 지위와 권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부정부패를 저지르는 게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한국은 불확실성 회피 성향이 강하다. 계획이 어긋나면 '문제가 있다'고 여긴다. 이 문제에 대한 원인을 살피고, 제거하려는 경향이 크다.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예측이 실패할 가능성을 줄이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러한 문화는 예상에서 벗어날 경우 좀 더 감정적으로 된다. 이와는 반대로 이들 나라는 한국과 비교하면 불확실성 회피 성향이 약하다. 계획대로 되지 않아도 느긋하다. 원인을 분석하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강했다. 이러한 이유로 한국에 비해 이들 나라 사람은 즉흥적으로 보이는 경우가 많다.
주재원의 주요 역할은 어느 한 측의 요구 사항을 상대국 측에 전달하고 협조를 구하는 일이다. 특히 한국 출장단 방문계획이 있는 경우 미리 면담을 확정하는 일이 쉽지 않다. 한국 출장단은 항공권, 숙소 예매 등 동선에 따라 미리 정해야 할 것들이 많다. 최소 1개월 전부터 면담 가능 날짜, 장소, 목적 등을 상대측에 알린다. 일정에 따라 교통편, 숙소 등을 예약하기 위해 면담 일정을 확인해 달라고 한다. 그런데 상대측은 면담을 일주일 앞둔 시점까지도 일정 확인을 해주지 않은 경우가 잦다. 면담 일이 다가올수록 불확실성이 커진다. 명확한 답변을 받기 위해 이메일, 왓츠앱, 전화 등 가능한 모든 수단을 총동원하게 된다. 때로는 직접 찾아가 일정 확인이 있을 때까지 무작정 기다린다. 일정 확인이 지연될 경우 향후 관계에 부담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압박하기도 한다.
그런데도 상대측이 일정 확인을 끝내 해주지 않아, 한국 측이 임박한 출장을 포기하는 일도 있다. 반면 상대측은 예고 없이 전화를 걸어와 고위 관계자가 3일 뒤 다른 나라에서 열리는 국제행사에서 발표하게 됐다고 급하게 전달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한국 측도 참석해 달라거나 행사 초대장을 행사 한 시간 전에 보내기도 한다. 사전고지 없이 갑자기 전화를 걸어와 '지금 회의하는데 빨리 오라'고 재촉해 담당자를 놀라게 한다. 왜 미리 안 알려줬냐고 따져봐야 소귀에 경 읽기이다.
한국과 비교하면 이들 나라는 남녀 성별의 사회적 역할·복장·행동 등을 엄격하게 구분한다. 일반적으로 남성적 문화가 강하다. 여성은 노동할 때도 불편해 보이는 통 좁은 치마를 입고 다닌다. 자녀를 많이 낳는 것이 미덕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크다. 법·관습·사회적으로 일부다처가 큰 거부감 없이 수용된다. 이집트 남부 농촌에서는 여성이 직업을 갖는 것을 아버지나 남편 등 남성의 무능력으로 받아들이는 인식이 여전히 남아있다.
한국은 식민지 지배에서 벗어나 해방 이후 자주독립 국가를 수립한 데 이어 짧은 기간 안에 민주주의가 성숙했다. 권위주의 탈피와 함께 결과보다 과정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 남녀 평등적인 문화로도 빠르게 전환했다. 그런데 아프리카 국가들은 더딘 민주화, 강력한 권위주의와 즉흥적인 면, 그리고 여전히 남성 중심의 문화가 남아있다. 이러한 현실을 마주치면 우리나라의 빠른 발전과 전환 경험에 매몰돼 이를 비판하고 평가하려는 태도가 나도 모르게 언행으로 나올 때가 있다. 개발협력 종사자로서 경계해야 할 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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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현정 소장
현 한국수출입은행 EDCF(대외경제협력기금) 이집트 카이로 사무소장, 서강대 영어영문학과 졸업, 서울대 글로벌 MBA, 세종대 국제개발협력학 석사, EDCF 탄자니아 사무소장(2017), 경협사업1부 팀장(2020), EDCF 아프리카부장(2021). EDCF 가나 사무소장(2022)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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