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연합뉴스) 김경윤 기자 = 엄마와 아빠를 보면 가끔은 신기하다. 어쩜 저렇게 하나부터 열까지 다른 사람 둘이 만나서 가족이 됐을까.
더 놀라운 것은 우리 집뿐만 아니라 다른 집에도 제각각 N극과 S극 같은 부모님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영의 기억'은 이처럼 한없이 다르면서도, 수십 년째 함께 살아가고 있는 그따띠(필명) 작가의 부모님 이야기를 풀어놓은 인스타툰이다.
작가의 아버지는 과묵하고 질서를 중시하는 보수적인 인물이다.
취미는 청소, 타고난 미니멀리스트라 어질러진 집을 못 견뎌 한다.
갑자기 대청소한다며 아내와 상의 없이 헌 이불을 가져다 버렸다가 그 속에 넣어둔 예물과 돌 반지를 모두 잃어버린 일은 '예물 청소사건'이라는 에피소드로 남아 있다.
전통과 예의를 중시하며 사극 '허준'의 예진 아씨처럼 참하게 내조하는 아내의 모습을 기대하기도 한다. 한 마디로 '유교보이'라고 작가는 묘사했다.
반면, 작가의 어머니는 시원시원하면서도 효율을 중시하는 '캘리걸'(캘리포니아걸)이다.
10년간 대기업에 다녔고, 결혼하고서도 개인사업을 하면서 사회생활을 이어왔다. 물건이란 늘 넉넉하게 있으면 좋다고 생각하는 맥시멀리스트이며 '사람은 각자 잘하는 것 하고 사는 것'이라는 신념 하에 살림은 남의 손에 맡겨왔다.
작가는 '유교보이'와 '캘리걸' 사이에서 나고 자란 자신을 한복 저고리에 레깅스를 입은 모습으로 그렸다.
그렇다고 이도 저도 아닌 혼종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끊임없이 집을 치우는 아버지와 굴하지 않고 집을 채우는 어머니를 보며 자란 끝에 음과 양의 기운이 합쳐져 그 둘과 다른 '0'(영)이 되었다고 스스로 자평한다. 여기서 '영의 기억'이라는 제목이 탄생했다.

공감하기 쉬운 가족과 유년 시절 이야기는 일상툰의 단골 소재다.
누구나 다룰 법한 소재지만, 그 가운데서도 '영의 기억'이 특별한 이유는 주제 의식에 있다.
작가는 부모님 이야기를 그리는데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고 털어놨다. 종전까지는 강아지, 운동 등 본인이 좋아하는 것만 그렸지만, 아버지에게는 여러 감정이 얽힌 상태였기 때문이다.
어두운 감정의 그림자를 거둬내고 자신의 유년 시절을 재조명하기 위해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그리기 시작했고, 그 결과 아버지를 한 명의 오롯한 인간으로 볼 수 있었다고 털어놨다.
작가는 "이 작업을 마치자 아빠가 아닌 한 남성의 현재가 보였다"며 "그 옆에 사랑받고 사과받고 싶어 하는 누군가의 딸이 아닌, 그냥 있는 그대로의 저도 보였다"고 설명했다.
또 부모님을 더는 엄마, 아빠라는 역할이 아니라 각각 한 명의 사람으로 보게 되는 이 과정을 '부모님을 졸업시켜드리는 것'이라고 표현하며, 독자들에게도 각자 부모님을 역할이 아니라 인간으로 대하고 있는지 질문을 던졌다.
이처럼 묵직한 메시지는 채색 없이 펜선으로만 이뤄진 가벼운 그림체에 담겨 너무 엄숙하지도, 그렇다고 한없이 가볍지도 않은 느낌을 준다. 이 같은 균형은 마치 '캘리걸'과 '유교보이'의 만남처럼도 느껴진다.
'영의 기억'은 작가의 인스타그램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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