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집자 주 = 한국국제교류재단(KF)의 2024년 발표에 따르면 세계 한류 팬은 약 2억2천500만명에 육박한다고 합니다. 또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초월해 지구 반대편과 동시에 소통하는 '디지털 실크로드' 시대도 열리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한류 4.0'의 시대입니다. 연합뉴스 동포·다문화부 K컬처팀은 독자 여러분께 새로운 시선으로 한국 문화를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되고자 전문가 칼럼 시리즈를 준비했습니다. 시리즈는 매주 게재합니다.] ◇ 너무 깨끗해진 세상, 그 역설 200년 전 선진국 국민의 평균 수명은 지금의 절반에도 못 미쳤다. 장티푸스, 콜레라 같은 전염병으로 젊은 나이에 목숨을 잃는 일이 흔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면역 체계가 과도하게 작동해 생기는 1형 당뇨병이나 천식 같은 자가면역질환·알레르기 질환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왜 그랬을까. 이를 설명하는 대표적인 학설이 두 가지 있다. 첫째는 '위생 가설'이다. 현대인은 너무 깨끗한 환경에서 자라다 보니 면역 체계가 충분히 훈련되지 못했고, 그 결과 작은 자극에도 과민하게 반응해 알레르기를 일으킨다는 설명이다. 둘째는 '오래된 친구(Old Friends) 가설'이다. 인류는 수백만 년 동안 특정 미생물들과 함께 살아왔고, 이 '오래된 친구'들을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아 면역 체계를 정상적으로 유지해 왔다. 그런데 현대에 들어 항생제 남용과 과도하게 가공된 식품 섭취가 늘면서 이 오래된 친구들이 대거 사라지고, 그 빈자리를 유해균이 차지하게 됐다는 것이다. 그 결과로 알레르기와 자가면역질환이 급증했다는 설명이다. 여기에 더해 십이지장충이나 촌충 같은 기생충, 즉 인류와 함께해 온 또 다른 '오래된 전우들' 역시 기생충 박멸 운동과 함께 자취를 감췄다. 문제는 이런 자가면역질환은 일단 발병하면 치료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스테로이드로 일시적인 증상 완화만 가능할 뿐, 근본적인 치료법은 아직 없다. ◇ 기생충을 다시 몸에 들이는 모험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일부 학자들은 과감한 시도에 나섰다. 면역 체계를 '오래된 전우'들과 공생하던 옛 시절로 되돌려 보자는 발상이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크론병(염증성 장 질환) 환자를 대상으로 한 실험이다. 크론병은 과거 한국인에게는 거의 발생하지 않던 질환이었지만 최근 들어 환자가 크게 늘고 있다. 연구진은 크론병 환자의 몸에 십이지장충을 의도적으로 감염시킨 뒤 약 1년간 그 상태를 유지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크론병 증상이 치유된 것이다. 기생충은 수만 년에 걸쳐 인간이라는 숙주와 공존해 온 존재다. 그 과정에서 숙주의 면역 기능이 적절한 수준으로 활성화되도록 하는, 즉 과도한 면역 반응을 일으키지 않으면서도 적당히 공존하는 정교한 방법을 터득해 왔다. 십이지장충이 몸속에 머무는 동안, 면역 체계는 더 이상 자신의 장 조직을 적으로 오인해 공격하지 않게 된 것이다. 다만 학자들은 십이지장충 감염 자체의 위험성도 함께 지적한다. 과학적으로는 합리적인 접근이지만, 실제 임상에 적용하기에는 부작용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안으로 상대적으로 안전한 촌충을 활용하는 방안이 제시되기도 한다. 아직은 실험 단계에 머물러 있지만, 이 연구가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오래된 친구'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장내세균 정원(Gut Garden)을 가꿔주는 일이야말로 건강을 지키는 핵심이라는 것이다. ◇ 배 속에 있는 '제2의 뇌' 장이 그저 하나의 소화 기관이 아니라는 증거는 또 있다. 장에는 '장신경계'(intestinal plexus)라고 불리는 신경망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곳에 분포한 뉴런의 수는 고양이의 뇌에 맞먹는 수준이다. 그래서 흔히 장을 '제2의 뇌'라고 부른다. 이 제2의 뇌는 1편과 2편에서 살펴본 미주신경이라는 고속도로를 통해 진짜 뇌와 끊임없이 정보를 주고받는다. 장내 세균이 식욕과 기분, 면역 반응까지 좌우할 수 있는 것도 바로 이 긴밀한 연결망 덕분이다. 이런 발견이 의학계에 던진 가장 큰 화두가 바로 '맞춤의학'(정밀의학)의 등장이다. 맞춤의학이란 환자 개개인의 유전자, 생활방식, 환경, 그리고 장내 미생물 구성까지 포함한 모든 특성에 맞춰 진료하는 새로운 의학 방식이다. 지금까지의 의학은 개인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고, 집단의 평균값에 맞춰 진단과 치료를 해왔다. 그러나 맞춤의학은 다음과 같은 변화를 가능케 한다. 첫째, 질병을 예측하고 예방할 수 있다.
둘째, 더 정확한 진단이 가능해진다.
셋째, 개인의 특성에 맞춘 치료를 제공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환자가 자신의 치료 과정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유도할 수 있다.
지난 칼럼에서 소개한 ZOE 같은 기업이 장내 미생물 분석을 통해 개인 맞춤형 식단을 제안하는 것도 이런 맞춤의학의 한 형태다. 결국 의학은 '모두에게 맞는 하나의 답'을 찾던 시대에서, '나에게 맞는 답'을 찾는 시대로 넘어가고 있다. 위고비와 마운자로 같은 비만 치료 주사제가 일시적으로 강력한 효과를 보이는 것도 사실이지만, 약을 끊으면 체중이 돌아오는 이유 역시 결국 이 뱃속 생태계, 즉 장내세균과 면역 체계의 근본적인 균형을 바꾸지 못했기 때문일 수 있다. 진정한 건강은 주사 한 방이 아니라, 수십조 마리의 '오래된 친구'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다. (4편에서 계속) 엄융의 서울의대 명예교수
▲ 서울의대 생리학교실 교수 역임 ▲ 영국 옥스퍼드의대 연구원·영국생리학회 회원 ▲ 세계생리학회(International Union of Physiological Sciences) 심혈관 분과 위원장 ▲ 유럽 생리학회지 '플뤼거스아히프' 부편집장(현) ▲ 대한민국의학한림원 정회원(현) ▲ 대구경북과학기술원 학제학과 의생명과학전공 초빙석좌교수(현)
<정리 : 이세영 기자>
sev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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