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디자인 전시에 호랑이 민화…한국계가 빚은 영국식 정원

(런던=연합뉴스) 김지연 특파원 = 정돈된 초목 사이로 조용히 뻗어 있는 돌바닥 끝에 석조 분수가 단정하게 서서 손님들을 맞이한다. 또렷한 좌우대칭과 격조를 갖췄으나 공기를 짓누르지는 않는 우아하고 절제된 영국식 정원이다.
몇 개의 방을 지나면 알록달록한 색의 향연이 펼쳐진다. 조선시대 병풍이나 족자 속에서 튀어나온 듯한 호랑이와 토끼, 소나무, 고양이가 벽 곳곳에 새겨졌고 아기자기한 단청이 천장을 수놓고 있다.
2일(현지시간)부터 한달간 영국 런던에서 열리는 인테리어 축제 '와우하우스'(WOW!house)에서는 한국계 디자이너 2명의 손끝에서 탄생한 전혀 다른 분위기의 두 공간을 만날 수 있다.
와우하우스는 런던 첼시 하버 디자인 센터에 마련된 600㎡(약 182평) 공간에 22개의 방을 꾸며 선보이는 인테리어 전시다. 당대에 주목받는 디자이너들을 초청해 각각 공간을 자율적으로 꾸미도록 맡긴다.
2005년 영국에 건너와 활동 중인 황혜정(영국명 헤이 황) 작가는 2016년 세계적 권위의 정원 박람회 '첼시 플라워쇼' 쇼가든 부문에서 은상을 수상한 정원 디자이너이자 조경 건축가다. 이번 행사에서는 파트너 사이먼 키친과 함께 운영하는 '더 가드니스츠'(The Gardenists) 이름으로 '아토리어스 페이버 입구 정원'을 디자인했다.
한국계 미국인 디자이너 영 허 작가는 엘르 데코, 아키텍처 다이제스트 등 미국 인테리어 전문지가 선정하는 톱 디자이너 명단에 단골로 오르며 주목받는 디자이너로, 페인트 브랜드 벤자민 무어와 협업한 '벤자민 무어 민화 살롱'을 선보였다.

작품 제목에 '민화'(Minhwa)라는 낱말이 명시됐듯 한국 민화에서 받은 영감이 공간 전체에 고스란히 녹아들었다.
1일 언론 사전 공개 행사에서 만난 허 작가는 "한국의 민화를 강조해 보여주고 싶었다. 색채를 아주 잘 드러내면서도 현대적인 방식으로 살리고자 했다"며 이번 작품의 전반적인 콘셉트를 '민화 모더니즘'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한국 전통 공예나 색동 같은 걸 보고 도널드 저드, 피에트 몬드리안, 댄 플래빈과 같은 모더니즘 아티스트를 떠올렸다"며 "민화는 이름 없는 사람들의 예술이면서 모든 사람을 위한 예술이기에 특별하다"고 설명했다.
미국 디트로이트에서 태어나 뉴욕에서 활동 중인 허 작가는 "한국계로서 내 헤리티지(유산)에 대해 가장 자랑스러운 것은 우리 문화의 창의성과 다채로움"이라며 "K-팝, K-드라마뿐 아니라, 우리는 아주 특별한 예술가, 장인들이고 우리에겐 대단히 중요한 문화가 있다. 그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다"고 강조했다.
공간에 한국 전통의 요소가 대거 도입됐으나 전반적인 분위기는 더없이 현대적이다. 허 작가도 이를 '전통적인 것'과 '동시대적인 것'의 융합으로 설명했다.

황혜정 작가가 디자인한 정원은 고전적인 영국식 건축과 정원이라는 전통에 현대적인 해석을 입혔다.
잉글랜드 석회석으로 정교하고도 정갈하게 장식한 바닥과 벽면 사이 사이로 월계수, 폭스글러브, 아스틸베 디아망, 잉글리시 아이비, 만리향 덩굴 등 영국 정원에서 가장 사랑받는 초목이 조용한 아름다움을 뽐낸다.
황 작가는 "이 정원에 앉아서 쉬고 싶다는 느끼게 받게하고 싶었다"며 "세세한 부분에서는 현대적인 스타일을 담으면서도 여러 요소가 함께 어우러질 수 있도록 했다"고 소개했다.
19세기 말∼20세기 초 거장 건축가 에드윈 루티언스가 정원의 뼈대를 만들고 정원 디자이너 거트루드 지킬이 식재로 생명력을 불어넣었듯이 건축과 조경이 하나로 어우러지도록 하고 싶었다는 설명이다.
첼시 플라워쇼에서 2016년 정보기술(IT)과 정원을 결합한 '스마트 가든'을, 2018년엔 대기오염에 대한 해법을 구상한 'LG 에코시티'를 선보였던 황 작가는 이번에는 고전적인 영국식 정원을 빚어냈다.
황 작가는 "한국적인 것, 동시대적인 것을 늘 생각한다"면서도 "정말 중요한 건 그 집, 그 건물에 맞는 정원을 만드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황 작가는 "한국 아티스트들이 혼을 담아 엄청난 노력을 들여 작품 활동을 하고 있고, 다른 아시아와도 다른 독특함이 있기 때문에 디자인 분야에서도 점점 주목받고 있다"며 "앞으로도 더 그렇게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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