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시장 철수 4년…떠났지만 잊히지 않으려는 한국기업들

(모스크바=연합뉴스) 최인영 특파원 = 현대차는 최근 러시아 공장 재매입 옵션을 포기했지만 모스크바 번화가 한복판에서 여전히 전시관을 운영하고 있다.
모스크바 노비(new)아르바트 거리에 위치한 현대모터스튜디오다. 2층 규모인 이 공간은 수소 엔진 등 현대차의 기술을 소개하는 전시 외에도 계단식 강당, 카페, 휴게 공간 등을 갖췄다.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회장에 관한 책도 비치돼 있다. 방문객이 요청하면 간단한 투어도 제공한다.
비록 전시된 차량은 2020년식 구형 아이오닉 1대뿐이지만 이곳을 찾는 러시아 젊은이들의 발길은 끊이지 않는다.
이들은 대부분 자동차나 엔진을 구경하기보다는 탁자에서 일이나 공부를 하고 있다. 조용한 도서관 분위기다. 누구나 이 공간을 공유 오피스로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 머물려면 꼭 커피를 주문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직원은 웃으며 "아니오"라고 말했다.
다른 직원에게 현대차의 러시아 시장 복귀 여부와 관계없이 이 스튜디오가 계속 운영되느냐고 물었더니 "구체적인 향후 계획은 모르지만 최소 5년간은 열려 있을 것"이라고 했다.
현대차는 2022년 2월 24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특별군사작전' 개시 이후 서방 제재로 러시아 내 사업이 어려워지자 상트페테르부르크 공장 가동을 중단했고, 2023년 12월에는 러시아 업체에 공장을 매각했다. 2년 내 공장을 되살 수 있는 바이백 옵션이 붙어 있었지만 이달 초 이를 행사하지 않기로 했다고 밝혔다.

23일(현지시간) 러시아 내 한국 업계에 따르면 현대차처럼 많은 주요 한국 기업들은 4년 전 우크라이나 상황 여파로 러시아 시장을 떠난 이후에도 러시아 내 최소한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평화 협상 타결을 당장 기대하기는 어렵지만 문제가 해결되고 정세가 안정될 경우에 대비해 복귀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이다. 한 기업 관계자는 "대체로 상황이 좋아지면 신속히 재진입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한국 기업들은 러시아에 사무실을 유지하고는 있지만 각종 대러 제재 때문에 사업을 직접 전개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그래서 카자흐스탄, 중국 등 제3국을 통해 러시아에 상품을 공급하고 있다. 또 국내와 미국, 유럽 내 브랜드 평판을 관리해야 하기 때문에 러시아에서 적극적으로 사업하는 모습을 드러내기를 경계한다.
하지만 기존에 쌓아 올린 러시아 내 브랜드 가치를 유지·관리해야 할 필요성도 있다. 문화예술 후원과 사회공헌을 통한 이미지 제고 활동이 눈에 띈다.
삼성전자는 2003년부터 러시아 레프 톨스토이 박물관과 공동 제정한 톨스토이 문학상(야스나야 폴랴나상)을 후원하고 있다. 2024년에는 한국계 미국 작가 김주혜가 장편소설 '작은 땅의 야수들'로 톨스토이 문학상 해외문학상을 수상했다. 삼성전자와 톨스토이 박물관은 지난 5일 제24회 톨스토이 문학상 시상을 위한 작품 접수를 시작한다고 발표했다.

지난달 26일에는 롯데가 후원하는 푸시킨 신인 문학상이 수상 후보작 접수를 시작했다. 러시아의 위대한 시인이자 소설가 알렉산드르 푸시킨을 기리며 재능 있는 산문 작가와 시인을 발굴하는 이 상은 올해 10주년을 맞았다.
모스크바 푸시킨미술관에는 전시 정보를 알려주는 디스플레이가 설치돼 있는데, 기기에 LG전자 로고가 새겨 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마린스키 극장 입구와 매표소에도 다양한 공연 정보를 제공하는 LG전자의 모니터들이 세워져 있다.
최근 삼성전자, LG전자, 현대차, 기아 등 한국 기업들이 러시아연방지식재산서비스(로스파텐트)에 상표권 등록을 신청했다는 보도들도 잇따랐다. 다른 글로벌 기업들도 러시아에 상표권을 등록하고 있는데 상표 권리 보호를 지속하고 러시아 시장 복귀 가능성을 염두에 둔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비롯한 러시아 고위 관리들은 서방 제재로 러시아 시장을 떠난 글로벌 기업의 복귀 가능성에 대해 "문을 쾅 닫고 나간 기업들은 쉽게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고 엄포를 놓고 있다.
업계에서는 러시아가 자국 시장에 재진입하려는 글로벌 기업에 대규모 현지 투자를 요구하는 등 높은 진입 장벽을 세울 것으로 전망한다. 이런 상황에 대비해 러시아에서 철수한 한국 주요 기업들은 문을 세게 닫지 않고 문틈으로 한 줄기 빛이라도 들어오게 만든 상태로 보인다.
한편으로는 러시아 시장 진출을 새롭게 모색하는 움직임도 있다. 세계적인 K푸드, K뷰티 열풍이 러시아에서도 불고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 마트에는 이미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은 컵라면 도시락, 초코파이 외에도 다양한 한국 과자와 라면, 아이스크림, 술, 화장품, 샴푸 등이 매대를 가득 채우고 있다.
지난 9∼12일 모스크바 국제식품박람회에는 농림축산식품부와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가 통합한국관을 구성해 신선과일, 인삼제품, 냉동 김밥, 음료, 스낵류, 차(茶), 간편 편의식 등 다양한 한국 식품을 알리고 수출 상담을 진행했다.

abbi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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