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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특집] "공비가 자신을 인질로 잡고 협박해도 굴복하지 말라던 어머니"

연합뉴스입력
"유학가는 아들에게 말없이 태극기를 건네주던 어머니" "장애아동 놀렸다고 회초리로 자신을 때리라던 어머니" "아무리 몸이 아파도 누워 있으신 적이 없었던 어머니"

"유학가는 아들에게 말없이 태극기를 건네주던 어머니"

"장애아동 놀렸다고 회초리로 자신을 때리라던 어머니"

"아무리 몸이 아파도 누워 있으신 적이 없었던 어머니"

아기 시절 전인범 전(前) 특전사령관과 부모님[본인 제공]
[※ 편집자 주= 이번 특집 기사는 그동안의 인터뷰 내용 가운데 어머니가 자녀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 보여주는 내용을 주로 발췌해 묶었습니다.]
연합뉴스와 인터뷰 중인 전인범 전 특전사령관[신현우 기자 촬영]

(서울=연합뉴스) 윤근영 선임 기자= [삶] 인터뷰에 참여한 사람들(인터뷰이들)은 존경하는 사람으로 어머니를 꼽는 경우가 많았다.

자녀들을 위해 희생적이고 헌신적인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을 정성껏 돕고, 사회적 약자를 외면하지 않는 모습도 자녀들에게는 깊은 인상을 줬다..

그들은 어머니의 이런 삶을 보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배웠다. 인생철학과 가치관은 이렇게 형성됐다.

아버지들은 일찍 사망하거나 경제적으로 무능한 경우가 꽤 있었다.

이는 인터뷰이들이 어린 나이에 일찍 철이 들고, 더욱 치열한 삶을 살아가는 계기가 됐다.

다음은 2022년 9월부터 진행한 [삶] 인터뷰에서 인터뷰이들이 언급한 어머니에 대한 내용만을 묶은 것이다.

※ 표시의 내용은 인터뷰 진행자인 윤근영 기자의 보충 설명이다.

연합뉴스와 인터뷰 중인 장인순 전 원자력연구소 소장[윤근영 기자 촬영]

◇ 전인범 전(前) 특전사령관

-- 아버지는 어떤 분이었나.

▲ 황해도 출신인데, 남북한이 분단되기 전에 한국으로 내려오셨다. 아버지는 미국에서 의학 공부를 하다 할아버지가 뇌경색으로 쓰러지시자 귀국하셨다.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사업을 이어받았지만, 성공적으로 운영하지는 못하셨다. 아버지는 선한 성품을 가졌던 분인데, 사람 보는 눈이 없어서 사업에 실패했던 것 같다.

-- 어머니(홍숙자)는 어떤 분이었나.

▲ 최초의 여성 외교관이었고, 애국심이 강하셨다. 미국에서 공부할 때 나를 임신한 지 7개월 정도 됐는데, 정확한 임신 개월 수를 속이면서까지 비행기에 탑승했다. 한국에서 나를 낳기 위한 것이었다. 어머니가 이렇게 한 것은 당신의 자식은 한국에서 태어나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기 때문이다. 그 당시 유학생들의 목표 중 하나가 미국에서 아이를 낳는 것이었다. 미국 시민권 획득을 위해서다. 나의 어머니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 1968년 '김신조 사건' 당시 어머니는 어린 아들에게 "만약에 공비가 나를 포로로 잡고 협박하면 나를 희생하더라도 굴복하면 안 된다"고 했다는데, 보통 어머니와는 다른 듯하다.

▲ 그때 나는 10살밖에 안 됐는데, 어머니가 그런 말씀을 하시니 무서웠다. 내가 군 장교로 임관한 이후 국가를 위해 죽었다면 슬퍼하셨겠지만, 자랑스러워하셨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김신조 사건'은 1968년 1월 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 속속 공작원 31명이 박정희 대통령 암살을 목적으로 청와대 근처인 세검정까지 침투한 사건을 말한다. 공작원 29명은 사살됐고, 1명은 미확인이었다. 김신조는 투항했다.

대학교(고려대 화학과) 졸업식장에서 장인순 전 한국원자력연구소장과 어머니[본인 제공]
(※ 전인범 전 장군은 육군사관학교 출신 가운데 5%도 안 되는 3성 장군을 지낸 인물이다. 보국훈장 광복장을 포함해 군 생활 중에 받은 훈장이 11개에 달했다. 이는 빠른 상황판단 능력과 뛰어난 리더십 때문에 가능했다. 보다 근원적으로는 어머니로부터 이어받은 강한 애국심 덕분인 듯하다.)
연합뉴스와 인터뷰 중인 김홍신 작가[연합뉴스 사진]

◇ 한국 원자력의 대부 장인순 전(前) 원자력연구소장

-- 고향은 어디인가.

▲ 전라남도 여수에서 뱃길로 1시간 정도 걸리는 돌산이라는 섬이다. 지금 돌산은 다리로 여수와 연결돼 있지만 당시는 완전한 깡촌이었다. 7남매 중 넷째인 나는 그 섬에서 어렵게 성장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곳에서 보리와 고구마 농사를 짓고 약간의 장사도 하셨다. 초등학생 시절에 나는 밭에서 고구마를 심고, 산에 가서 나무(땔감)를 했다. 나는 주로 고구마를 먹고 자란 사람이다. 돌산은 갓김치로 유명하지만, 우리 마을은 이 농사를 짓지 않았다.

-- 돌산은 어촌인데, 왜 농업이 주업이었나.

▲ 그때는 고기 잡는 배가 없었고, 어업 기술도 별로 않았다. 어업은 바다에서 낚시하는 정도였으니 생계 수단이 되지 않았다.

건국대(국어국문학과) 졸업식에서 김홍신 작가와 어머니[본인 제공]

-- 1940년생으로서 여수중과 여수고에 진학할 정도이면 집안 형편이 어느 정도 괜찮았던 것 아닌가.

▲ 우리 집 형편이 정말로 안 좋았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무슨 일이 있어도 공부는 해야 한다"면서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보냈다. 외할아버지가 한자를 많이 알았고, 교육열이 매우 강하신 분이었다. 어머니는 외할아버지 영향을 받았던 것 같다.

-- 돌산 초등학교에서 여수중에 진학한 사람은 몇 명이었나.

▲ 당시에는 초등학교를 '국민학교'라고 했는데, 한 학년에 2개 반이 있었다. 1개 반은 남자 60명이었고 나머지 1개 반은 남자 30명, 여자 30명이었다. 그때는 여자아이에게는 공부를 안 시켰던 시절이었다. 120명 가운데 여수중학교에 진학한 아이는 나를 포함해 3명뿐이었다. 이들 3명 모두가 나중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 장인순 전 원자력연구소장은 캐나다 웨스턴온타리오 대학교에서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 유학 생활이 매우 힘들었는데, 이를 견디게 해준 것은 어머니였다고 했다. 그분은 유학 가는 아들에게 태극기를 흰 종이에서 싸서 줬다고 한다. 장 전 소장이 원자력 기술의 자립을 이뤄낸 것은 애국심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선후배 동료들과 밤새우는 날이 허다할 정도로 어려운 연구였고, 모욕과 방해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애국심을 심어준 사람이 바로 어머니인 듯하다.)

2001년 의원회관에서 농성 중인 김홍신 의원김 의원은 2001년 12월 의원회관에 있는 자신의 사무실에서 농성을 벌였다. 건강보험 재정분리라는 한나라당 당론에 반대하다 국회 보건복지위에서 '축출' 당하자 이에 항의하기 위한 것이었다. [연합뉴스 사진]

◇ 밀리언셀러 소설 '인간시장' 작가 김홍신(전 국회의원)

-- 아버지는 대목수였다고 하던데.

▲ 집을 지으려면 목수, 미장이, 기와 얹는 사람 등을 동원해야 하는데, 이를 총괄하는 사람을 대목수라고 한다. 지금으로 말하면 건축업자다. 아버지는 대목수로서 자기 몫을 잘 챙기는 사람이 아니었다. 상량식을 하면 광목도 걸고, 쌀도 걸고 하는데, 모든 것을 다른 사람한테 나눠주고 빈손으로 오시곤 했다. 집을 지을 때 주인이 여러 가지 추가 요구를 해서 건축비가 예상보다 많이 들어가면 그 돈을 주인한테 받아내야 하는데, 아버지는 그걸 못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인심을 얻고, 법 없이 살 사람이라는 말을 들었지만, 어머니는 원망이 있었다. "네 아버지를 믿고 살기 어렵다." 어머니가 나한테 한 말씀이었다.

-- 어머니는 엄격하신 분이었다고 하던데.

▲ 어머니는 자식들에게는 너무 엄격해서 나는 친어머니가 아닌 줄 알았다. 걸레를 던져주고는 방을 쓸고 닦으라 했다. 물도 길어와야 했다. 어린아이가 마루에서 밥을 먹다가 땅에 흘리는 것은 당연한데도 흙이 묻은 밥알을 씻어서 입에 넣으라고 하셨다.

-- 장애아이를 놀려서 혼났다는 이야기는 뭔가.

▲ 한번은 동네의 장애 아이를 친구들과 함께 놀린 적이 있었는데, 그 아이가 울고 가는 것을 우리 어머니가 봤다. 어머니는 나를 끌고 그 집으로 가서는 용서를 빌라고 했다. 다른 친구들의 어머니는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았는데, 우리 어머니만 그걸 요구했다.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집에 온 뒤에 회초리를 해오라고 했다. 나는 그걸로 맞을 줄 알았는데, 어머니는 당신의 치마를 걷어 올리시고는 "내가 너를 잘못 가르쳤으니 나를 때려라."라고 했다. 그때 나는 어머니를 붙잡고 울면서 잘못했다고 빌었다.

연합뉴스와 인터뷰 중인 란코프 교수[윤근영 기자 촬영]

-- 어머니는 강단이 있었던 분인가.

▲ 큰아버지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문중에서는 나를 큰 집의 양자로 보내라고 했다. 아버지는 성격이 착한 분이니 아무 말도 못 했다. 아버지의 그런 모습에 답답해하던 어머니는 "나는 죽어도 못 보낸다"면서 버티셨다. 어머니가 오랫동안 문중의 미움을 받았던 이유다.

-- 학교 플라타너스 나무에 묶인 사건은 무엇인가.

▲ 한번은 내가 동네 또래 친구를 때린 적이 있었다. 그 친구가 문중의 항렬로는 나에게 먼 당숙 뻘이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부르자 그 친구는 아저씨라고 부르지 않는다면서 화를 냈다. 싸움이 일어났고, 그가 나한테 얻어맞았다. 문제는 그 아이의 형이 4명이나 됐는데, 그들이 몰려와 나를 때린 것이었다. 이를 알게 된 어머니는 방석 하나 들고는 나를 끌고 초등학교 운동장으로 갔다. 그러고는 내 몸을 플라타너스 나무에 새끼줄로 묶었다. 이어 그 앞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농성을 시작했다.

어린 시절 란코프 교수와 어머니[본인 제공]

-- 어떻게 됐나.

▲ 조용하고 심심한 시골에 이보다 더 재미있는 구경거리는 없었다. 동네 사람들이 몰려나왔다. 어머니는 "내 아들을 죽여라. 내 앞에서 죽여라"라고 소리를 질렀다. 사람들이 말리자 "내가 서방질해서라도 아들을 하나 더 나을껴!"라고 했다. 그 순간 나는 아찔했다. 어린 나이이지만 서방질의 의미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 아이의 부모님 두 분과 그 형들이 모두 찾아와 잘못했다고 빌어야 했고,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약속했다. 그때서야 나는 나무에서 풀려나올 수 있었다. 그 일은 우리 동네의 대형 사건이었는데. 그 이후에는 동네에서 나를 건드리는 아이들이 없었다.

연합뉴스와 인터뷰 중인 장기표 선생[연합뉴스 사진]
(※ 김홍신 작가는 아버지로부터 남들을 돕는 넉넉한 성격을 물려받았고, 어머니로부터는 큰일 앞에서 강단 있게 결행하는 법을 배운 듯하다. 이는 국회의원 시절 약자를 위한 입법, 강한 소신 발언을 주저하지 않는 성향의 토대가 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국회의원 시절에는 농성을 한 적도 있는데, 그 효용성에 대해서는 어린 시절, 어머니로부터 배운 듯하다.)
연합뉴스와 인터뷰 중인 현정화 감독[연합뉴스 사진]

◇ 국제문제 전문가 안드레이 란코프 교수

-- 러시아의 명문 대학교인 레닌그라드 대학교를 졸업했는데, 당 간부의 아들이었나.

▲ 그 대학 이름이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으로 바뀌었다. 나는 서민 집 외아들이었다. 우리 부모님은 엘리트 계층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선박 등에 사용되는 대형 보일러의 기사였고, 어머니는 궤도열차와 무궤도 열차의 운전기사였다. 내가 7살 때 부모님은 이혼했다. 나는 부모님 결별 이후 어머니, 외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 부모님은 왜 이혼했나.

▲ 그 이유를 알지만, 사적인 일이어서 말하기 곤란하다. 러시아에서는 부모가 이혼하면 자녀들은 거의 예외 없이 어머니와 산다. 어머니가 키우는 비율이 95%나 되는데, 자녀 양육에는 어머니가 더 낫다고 보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양육비를 지원한다.

연합뉴스와 인터뷰 중인 조명숙 여명학교 교장[연합뉴스 사진]

-- 어머니는 어떤 분이었나.

▲ 운전기사 노동자였지만 세계에 대한 지식이 많았다. 책도 많이 읽으신 분이었다. 1970년대 브레턴우즈 체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통화체제)가 흔들렸을 때 나는 8∼9살 무렵이었다. 그때 어머니는 금본위제가 무엇인지, 브레튼우즈체제가 무엇인지 정확히 설명했다. 아직도 어머니의 그 설명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 아버지는 사냥과 캠핑을 좋아하는 분이었다.

-- 당시 소련에서는 노동자 출신이 대학 진학하는 것이 어려웠나.

▲ 그렇지는 않았다. 대부분의 청소년이 대학교에 진학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부모들도 자녀들을 열심히 공부시키려 하지 않았다. 나의 어머니는 달랐다. 아들을 좋은 대학에 보내야겠다는 생각이 강했다. 나의 교육을 생각해서 재혼도 하지 않으셨다.

(※ 란코프 교수는 미국 오바마 대통령의 초청을 받아 백악관을 방문해서는 한반도 문제에 대해 자문할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는 국제문제 전문가다. 그가 학자로서 성공한 것은 어머니의 학구적 자세를 이어받았기 때문인 듯하다. 웬만한 지식인들도 브레턴우즈 체제를 어린아이에게 쉽게 설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 영원한 재야 고(故) 장기표 선생

-- 고향은 어디인가.

▲ 경남 밀양군(현 밀양시)의 종남산과 덕대산 중간의 산 중턱에서 태어났다. 나는 4남 2녀 중 막내였다. 초등학교 6학년 때 김해군(현 김해시) 한림면으로 이사를 왔다. 밀양에서 살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삼촌들과 형제들을 결혼시키면서 땅을 1∼2마지기씩 떼어서 주다 보니 살림이 쪼그라들었다.

-- 아버지는 어떤 분이었나.

▲ 근본적으로 농민이다. 다만, 마을 청년들 다섯명 정도를 사랑방에 불러 놓고 천자문, 소학 같은 것을 가르치셨다. 권위주의적이고 괄괄한 성격이었다. 경제적으로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빈농이었다.

-- 어머니는 어떤 성격이었나.

▲ 49세에 나를 낳으셨다. 자기 이름도 못 썼지만 총명하신 분이었다. 사친가, 회심곡 같은 아주 긴 가사를 모두 외웠다. 인내심이 강하고 여성스럽고, 지혜로운 분이었다. 내가 서울 구치소에 수감돼 있을 때 막내아들 얼굴 한번 봐야겠다면서 추운 겨울에 형수님과 함께 면회를 오셨다. 당시에는 KTX도 없었기에 열차로 8시간 정도 걸렸다. 나이 든 분들은 소변을 자주 보게 되는데, 그 긴 시간을 어떻게 견디셨는지 생각하면 지금도 말이 안 나온다. 어머니는 다음 해인 1978년에 돌아가셨다. 당시 나는 대구교도소에 있었다.

(※ 장기표 선생은 별세하기 직전까지 뛰어난 기억력과 날카로운 판단을 유지했다. 여전히 약자의 삶을 걱정하고 개선하려는 따뜻한 마음씨를 갖고 있었다. 이런 두뇌와 성향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듯하다. 그는 대한민국에서 민주화를 이루고 노동자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평생을 바친 사람이다. 9년간의 감옥생활과 12년간의 수배 생활을 했지만 나라에서 준다는 민주화운동 보상금은 1원도 수령하지 않았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마사회 탁구 감독 현정화

-- 어릴 때 가정 형편은 어떠했나.

▲ 매우 어려웠다. 초등학교 시절에 육성회비를 내지 못해서 칠판에 이름이 적히곤 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탁구를 시작하면서 트레이닝복을 사야 했는데, 돈이 없어서 곤란했던 것도 생각이 난다. 아버지는 폐결핵을 앓다가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다. 가정주부였던 어머니는 갑자기 식당 조리사로 일하게 됐는데, 늘 일찍 일어나시고 늦게 주무셔야 했다.

-- 좌우명이나 삶의 원칙이 있다면 무엇인가.

▲ 항상 노력하는 사람이 되자는 것이다. 나 스스로 약간의 나태함도 허용하지 않았다. 대회에서 1등이 아니면 실패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한 게임이라도 지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내가 살이 안 찌는 것도 이런 성격의 영향이 있다.

-- 존경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 어머니다. 늘 곧았고 부지런하셨다. 나는 어머니 영향을 많이 받았다. 자녀들을 키우면서 아플 때도 있었지만 누워서 편하게 지내시는 것을 보지 못했다. 내가 누구보다도 성실한 선수 중의 한 명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의 영향이다.

(※ 현정화 감독이 탁구 선수로서 성공한 것은 뛰어난 운동감각 외에도 강한 승부욕과 남다른 성실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최선을 다하는 성실한 자세는 운동뿐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성공 요소인데, 현 감독은 이를 어머니로부터 배운 듯하다.)

◇ 탈북청소년 학교인 여명학교의 조명숙 교장

-- 부모님은 어떤 분인가.

▲ 아버지는 월남전 상이용사였다. 금은세공, 개인택시, 트럭 운전, 옷걸이 장사 등 여러 사업을 하셨으나 실패하셨다. 평소에는 내성적이고 말이 없으셨다. 그런데 술을 마시면 난폭해져서 가족들을 괴롭혔다. 월남전 트라우마 때문이다. 어머니는 막걸리 장사, 공장일, 구멍가게, 아파트 청소 등을 하시면서 자식들을 먹여 살렸다. 어머니의 막걸릿집 단골손님 중 한 분이 돌아가신 천상병 시인이었다. 어머니가 막걸리를 넉넉하게 드려서 그분이 단골이 됐다. 어릴 때는 몰랐는데, 그분이 TV에 나오는 것을 보고 유명한 시인인 것을 알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천상병 시인은 사랑이 가득한 눈빛을 갖고 계셨다.

-- 어머니가 정이 많은 분이었나.

▲ 인정이 많았다. 걸인한테 밥을 줘도 찬밥이 아닌 새로 지은 뜨거운 밥을 주셨다. 그래서 걸인들이 우리 집 앞에 줄을 서기도 했다. 나는 어머니한테 "다른 집처럼 우리도 찬밥을 주면 되지, 왜 뜨거운 밥을 주느냐"고 항의한 적이 있다.

-- 그 항의에 대해 어머는 뭐라고 말씀하셨나.

▲ "그분들이 우리 집에서라도 대우받아야 하지 않느냐"라고 하셨다. 어머니가 구멍가게를 할 때는 빵을 공급하는 아주머니, 우편물을 배달하는 우체국 아저씨 등에게 공짜로 밥을 주기도 했다. 이렇게 도움을 주면 도움을 받는 일이 생기기도 했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장례를 치르느라 가게 문을 닫아야 했는데, 이런 분들이 오셔서 가게를 봐줬다. 매일 벌어 먹고살아야 했던 우리 집은 그분들의 도움으로 생계를 이어갈 수 있었다. 나는 어머니로부터 정이 있고 따뜻하면서 재미있게 사는 법을 배웠다.

(※ 조명숙 교장은 대학교 시절부터 남들을 돕기 시작했다. 성인이 돼서는 중국지역 두만강 변에서 탈북자를 도왔는데, 이는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는 위험한 일이었다. 그가 이렇게 살아간 것은 어머니로부터 이타적인 삶의 가치를 배웠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keunyoung@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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