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68년간 쌓아온 시 세계…허만하 시집 '별빛 탄생'

(서울=연합뉴스) 황재하 기자 = ▲ 별빛 탄생 = 허만하 지음.
"내가 세계를 보는 눈빛은 세계가 나를 보는 눈동자 반짝임이다. 당신이 '나'라 부르는 정체불명이 내가 포옹하는 따뜻한 남인 것처럼."(시 '풍경 눈빛' 전문)
모든 사람은 서로에게 타인이다. '나'라는 존재는 스스로에겐 익숙하나 타인에겐 정체불명의 존재다. 이 두 문장짜리 짧은 산문시는 시인이 어떻게 세상과 자아 사이의 관계를 인식하는지 보여준다.
1957년 작품활동을 시작해 시력(詩歷)이 68년에 달하는 허만하(93) 시인의 시집이다. 세계와 언어, 인간의 근원에 대해 탐구하고 성찰하는 53편의 시를 수록했다.
책은 3부로 구성됐다. 시인은 우선 '세계 이전의 형상'에서 세계를 바라보며 눈앞에 없는 것들을 상상한다. 이어 '오직 넓고 넓은 파란 하늘'에선 광활한 자연과 하늘을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 이렇게 세상을 향했던 시인의 시선은 마지막 '나타남과 사라짐 사이'에서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온다.
"한 그루 나무 실가지 흔들림 때문에 무성한 숲이 일렁이듯, 하늘 쳐다보는 아름다운 뺨의 비탈을 흘러내리는 한 방울 눈물의 반짝임에서, 영하의 겨울밤 가늘게 떠는 별빛이 태어난다."(시 '별빛 탄생' 전문)
문학동네. 96쪽.

▲ 치즈 이야기 = 조예은 지음.
반전을 거듭하는 흥미로운 서사로 호평받아온 소설가 조예은(32)이 펴낸 세 번째 소설집이다. 2022년부터 발표한 일곱 개의 단편을 수록했다.
표제작은 "어렸을 때 꾸었던 가장 무서운 꿈은 부모님이 치즈로 변하는 꿈이었습니다"라는 섬뜩한 문장으로 시작한다.
'나'는 어린 시절 부모에게 방치돼 죽을 고비를 넘긴 아픈 기억이 있다. 시간이 흘러 어머니는 병들었고, '나'는 복수하듯 별다른 처치 없이 어머니를 방치한다. 아픈 어머니는 마치 썩어가는 듯한 지독한 악취를 풍기고, '나'는 그 냄새가 잘 숙성된 치즈의 냄새와 비슷하다고 여긴다.
수록된 작품들은 기이하고 잔인한 감각적 소재가 등장해 독자에게 불편한 기분을 안긴다. 이 같은 불편함의 배경에는 인물이 느끼는 공포와 증오심 등 부정적인 감정이 있다.
이 밖에 '보증금 돌려받기'는 전세 보증금을 두고 집주인과 세입자가 극단적인 다툼을 벌이는 과정을 담았고, '수선화에 스치는 바람'은 쌍둥이 자매 중 한 명에게만 모든 지원을 몰아준 부모 아래서 차별받으며 자란 여성의 이야기다.
문학동네. 356쪽.

▲ 파란 캐리어 안에 든 것 = 듀나 지음.
'얼굴 없는 작가'로 널리 알려진 과학소설(SF) 작가 듀나의 단편소설집으로, 다양한 상상력을 담은 단편 SF 여섯 편을 수록했다.
표제작은 다양한 시간대를 여행하며 독재 정권을 무너뜨리는 일을 게임처럼 즐기는 제국의 일원인 주인공들이 2024년 12월 서울에 찾아오는 이야기다. 이들은 우연히 폐허가 된 시공간에서 마주친 파란 캐리어가 서울로 향한 흔적을 발견하고 캐리어의 행방을 추적한다.
독재자를 무너뜨리는 시간 여행자들이 방문한 곳이 하필 정권 퇴진 시위가 한창인 서울이라는 설정이 눈길을 끈다.
이 밖에 '아발론'은 바이러스에 휩쓸린 지구에서 극소수의 사람만 살아남아 아발론이라는 도시에 모여 살아가는 이야기를 다루고, '불가사리를 위하여'는 시간 여행자가 조선에 정착해 불가사리를 연구하다가 뜻밖에 범죄 피해자를 구출해주는 내용이다.
퍼플레인. 244쪽.
jaeh@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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