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전사우나'의 밤…추위 피해 왔지만 녹은 건 마음의 벽
(서울=연합뉴스) 한지은 기자 = 살을 에는 듯한 칼바람이 분 26일 늦은 저녁. 이미 영업이 끝난 용산구 후암동 '은전사우나' 안으로 70대 여성이 들어섰다.
물줄기 소리, 헤어드라이어 소리도 멈춘 목욕탕에선 잠옷 차림 여성들이 도톰한 이불을 덮고 두런두런 대화하고 있었다.
"집? 나는 저기, 서울역 뒤에 쪽방에 살아요. 집 앞까지 고드름이 얼어서…코끝까지 이불을 덮어도 추워서 여기서 자요."
뜨끈한 내부 공기에 볼이 붉어진 이모(70)씨는 민망하다는 듯 말했다.
은전사우나는 서울시가 마련한 야간 한파 쉼터 5곳 중 한 곳이다. 여성전용인 이곳은 영업시간이 끝나면 쪽방촌 주민들을 받는다.
주민들은 뜨끈한 물로 씻고 몸을 누인 뒤 다음 날 새벽 영업이 시작되기 전 쪽방으로 돌아간다.
이날은 이씨를 비롯해 김모(82)씨, 박모(59)씨 등 3명이 함께 밤을 보냈다.
모두 서울역 인근 월 25만∼30만원짜리 쪽방 주민이다.
탈의실 사물함과 화장대 옆에 이부자리를 편 이들은 목욕탕 분홍색 가운을 똑같이 걸치고 귤을 나눠 먹었다.
서울역 쪽방에서 산 지 10년이 넘었다는 김씨는 "집에 혼자 있는 것보다 여기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어서 좋다"고 말했다.
직접 깐 귤을 건네자 "예쁜이가 까준 귤이라 더 맛있어!"라며 기자의 손을 꼭 잡기도 했다.
박씨는 귤 한 조각을 우물우물 먹다가 "이가 거의 없어요"라며 치아 상태를 보였다. 앞니가 거의 없는 데다 어금니도 일부 빈 모습이었다.
그는 "나라에서 65살부터 임플란트 지원을 해주는데 아직 59살이라 한참 남았다"며 "몸이 성한 데가 없다"고 하소연했다.
이들은 쪽방촌이 다닥다닥 붙어있긴 하지만, 거주민끼리 어울리기는 쉽지 않다고 했다.
각자의 빠듯한 삶이 만들어 낸 마음의 벽 때문이다.
추위를 피하기 위해 모인 목욕탕은, 그래서 대피소인 동시에 사랑방이 됐다.
서로를 '여사님', '언니' 등 애칭으로 부르고, 추운 밤에도 목욕탕에 오지 않으면 전화를 해 무슨 일 없는지 안부를 묻는다고 했다.
대화에는 '혼자'와 '같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했다.
이날 자리에 없던 90대 '왕언니'의 이야기를 한참 하며 "여기 와서 대화를 자주 하니 치매 조짐이 옅어진 것 같다. 사람은 혼자 있으면 안 되고 같이 있어야 똑똑해진다"고 말했다.
한참 이야기꽃을 피우던 김씨는 "허리 아프지. 여기 누워"라며 박씨에게 뜨끈한 자신의 자리를 내어주었다.
이씨는 "쪽방은 힘든 사람들이 많다. 방이 추워서 아무리 난방해도 따뜻해지지 않는다"고 했다.
은전사우나 장정순(70) 사장은 이들에게 더 편안한 잠자리를 제공하기 위해 사비로 이부자리까지 들여놓았다.
손님이 없으면 같이 밥을 차려 먹기도 한다며 이들을 '가족'으로 칭했다.
장 사장은 "오시는 분들이 내년이라고 뭐 삶이 달라진다는 이런 게 있겠느냐"며 "우리는 그저 너무 추울 때 피할 곳으로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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