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역사학자 앤터니 비버가 쓴 역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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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송광호 기자 = 1917년 러시아 제국의 숨은 턱밑까지 차오르고 있었다. 제정은 부패가 만연했고, 백성들은 끼니 걱정에 시달렸다. 이런 상황에서 무도한 황제는 3년 전 제1차 세계대전 참전까지 결정했다. 오랜 전쟁으로 병사들의 불만도 폭주하는 상황이었다.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국회의원들로 내각을 구성해 민심을 달래야 한다는 신하들의 조언이 잇따랐지만, 황제 니콜라이 2세는 콧방귀만 뀔 뿐이었다.
'내가 신민들의 신임을 얻는 것이 아니라 신민들이 짐의 신임을 얻어야 하는 것 아닌가.'
니콜라이는 위기 상황을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현실 감각이 떨어지는 인물이었다. 리더의 무능은 곧 제국의 위기로 직결됐다. 그해 2월에 혁명이 발생했고, 300년간 지속한 로마노프 왕조는 문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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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정 러시아가 허무하게 끝장나 버렸지만, 권력은 진공상태를 허락하지 않는 법이다. 레닌, 트로츠키를 위시한 볼셰비키 지도부는 10월 혁명을 일으키며 정권을 잡았다. 그러자 각지에서 장교, 카자크, 우파 사회혁명당, 체코군단 등이 볼셰비키 타도 등을 외치며 봉기했다. 볼셰비키가 중심이 된 적군(赤軍), 그리고 왕당파가 중심인 백군(白軍)은 사생결단할 듯이 서로를 향해 총구를 겨눴다. '러시아 내전'(1917~1921)이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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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함락', '제2차 세계대전' 등 굵직한 현대사 책을 선보인 영국 역사학자 앤터니 비버의 신간 '러시아 내전'(눌와)은 잔혹한 전쟁이자 소비에트연방(소련) 탄생의 촉매제 역할을 했던 러시아 내전의 다양한 면모를 조명한 묵직한 역사서다. 저자는 세계대전이라는 격변 속에서 발생한 러시아 내전의 복잡한 양상과 국민의 피로 얼룩졌던 전쟁의 잔혹함, 적군의 승리 요인 등을 상세하게 설명해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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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따르면 볼셰비키는 전쟁 초반 전략적 실수를 여러 차례 범했다. 독일과의 종전 협상 과정에서 오판을 저질러 폴란드, 우크라이나 등의 영토를 잃었고, 러시아 황실에 충성하던 카자크인들을 회유하는 대신, 학살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레닌을 비롯한 지도부는 지속해서 암살 위험에 노출되기도 했다.
실수를 여러 차례 범했지만, 이를 극복할 만한 커다란 장점이 적군에겐 있었다. 일사불란(一絲不亂)함이다. 저자는 볼셰비키의 중앙집권적인 체계를 내전 승리의 가장 큰 요인으로 꼽는다. 레닌과 트로츠키를 중심으로 똘똘 뭉친 적군은 유기적으로 백군을 몰아붙였다. 한 전선에서 전력을 집중해 적을 무찌른 뒤 또 다른 전선으로 이동시키는 식의 전략을 구사해 우세를 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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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국가에서 온 다양한 인재들도 적군에게 커다란 힘이 됐다. 비밀경찰 체카(KGB의 전신)를 이끌었던 이는 폴란드인 제르진스키였다. 수많은 중국 공산당원들도 적군으로 활동했고, 라트비아 소총부대 또한 적군을 지원했다.
반면 백군의 지휘부는 사분오열돼 있었다. 동부는 알렉산드르 콜차크, 남부는 안톤 데니킨, 서북부는 니콜라이 유데니치가 이끌었다. 이들은 역전의 용장들이었으나 힘을 모으는 '두뇌'가 모자란 데다 욕심마저 컸다. 러시아의 공산화를 우려한 서방이 백군을 지원했으나 사분오열된 지휘부로 일사불란한 상대를 이길리 만무했다. 적군을 실질적으로 이끈 트로츠키는 이들을 각개격파 하며 차례로 궤멸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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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러시아, 폴란드, 우크라이나를 비롯한 여러 나라의 기록보관소에서 찾아낸 새로운 자료, 수많은 서적과 기록을 모아 이런 내용의 책을 완성했다. 그는 러시아 내전이 단순히 한 나라의 내전이 아니라 러시아 제국 붕괴 후 독립하려는 핀란드·폴란드,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적국이었던 독일, 기존 동맹 영국·프랑스 등이 개입한 국제 분쟁이었다고 말한다.
이혜진 옮김. 688쪽.
buff27@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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