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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물고문 사망' 박종철, 6월 민주항쟁 불씨 되다

연합뉴스입력

(서울=연합뉴스) 1987년 1월 14일은 당시 서울대생이던 박종철 열사가 경찰의 물고문으로 숨졌습니다. 열사의 죽음은 '6월 민주항쟁'의 불씨가 됐습니다.

1965년 부산에서 태어난 그는 중학교 3학년 때인 1979년 부마항쟁을 경험했습니다. 당시 학원수강을 마치고 귀가하던 길에 평소 친하게 지내던 여학생과 함께 시위대열에 합류했다가 최루탄 가스를 뒤집어쓰고 귀가했다고 합니다. 이 일은 그가 사회 모순에 대해 고민하게 되는 계기가 됐습니다.

박 열사는 1984년 서울대 언어학과에 입학했습니다. 입학 직후 동아리에 가입해 학생운동을 시작했습니다. 다음해 5월 서울 동작구 사당동에서 미국문화원 점거농성 지원시위에 참가했다가 구류 5일, 같은해 6월에는 구로구 가리봉동에서 노학연대 투쟁을 벌이다가 구류 3일을 살았습니다.

이어 1986년 4월 청계피복노조 합법화를 요구하는 시위에 참가했다가 구속돼 3개월 만에 출소했습니다.

이후에도 학생운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한 그는 1987년 1월 13일 자정 무렵 치안본부(현 경찰청) 대공분실 수사관들에 의해 연행됐습니다. 이들 수사관은 박 열사의 선배 행방을 추궁하며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전기와 물로 고문을 가해 죽음에 이르게 했습니다.

사단법인 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에 따르면 치안본부 측은 사건 이후 "탁하고 책상을 치니 억하고 죽었다"며 단순 쇼크사로 발표했습니다. 하지만 최종 검안의가 "오른쪽 폐에 탁구공만 한 크기의 출혈반과 목과 가슴 등에 피멍이 있었다"고 증언, 치안본부는 결국 물고문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이에 전국에서 대학생들과 시민들이 고문살인 은폐조작과 민주헌법쟁취를 외치며 격렬하게 시위를 전개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당시 연세대생이던 이한열 열사가 최루탄을 머리에 직접 맞아 숨졌습니다.

서울지방경찰청은 2008년 박 열사가 고문 끝에 숨진 남영동 대공분실을 보존하고 경찰청 인권센터로 명명했습니다. 앞서 1997년에는 모교인 서울대 교내에 추모비가 건립됐습니다.

유창엽 기자 김지효

yct9423@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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